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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이야기 ①

작성자 추모연대 등록일 2023-03-09 조회수 144회 댓글수 0건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이야기 ①

- 마석모란공원에 처음 안장된 열사는 누구일까? 


김학규 추모연대 교육·학술위원장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는 사회운동과 노동운동·농민운동·빈민운동 등 기층 민중운동, 학생운동, 시민운동을 벌이다 돌아가신 열사의 묘 160여 기가 들어서 있다. 이들 묘의 주인공은 하나같이 한국 사회가 처한 시대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고, 시대적 과제 해결을 위해 온몸으로 헌신하다 돌아가신 분들이다. 따라서 이곳에 안장되어 있는 열사들의 삶과 죽음을 되짚어 보는 일은 그들과 우리가 함께 살아온 한국 현대사를 온전히 이해하고 앞으로 어디로 나아가야할 것인지, 그 해답을 찾는 유력한 방법의 하나이기도 하다.

필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앞으로 몇 회에 걸쳐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되어 있는 열사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그 첫 번째는 마석모란공원에 민족민주열사묘역이 들어서게 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마석모란공원, 남한 최초의 사설 공원묘지

 

마석모란공원은 1966년에 조성된 한국 최초의 사설 공원묘지이다.

종중모지를 포함한 개인묘지와 마을의 공동묘지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운영되던 시대에서 제도로서의 공동묘지가 정비된 것은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묘지·화장·화장장에 관한 취체규칙>을 제정한 1912년부터였다. <취체규칙> 시행 다음해인 1913년 당시 경성부에 설치된 공동묘지는 신당리·미아리·이문동·이태원·만리동을 비롯하여 19개소가 있었다고 한다. <취체규칙>에 따르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개인묘지의 설치를 일절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는 조상숭배·존속존중 관념에 기반하여 개인묘지에 대한 욕구가 강했던 조선인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1918년부터 조선총독부는 <취제규칙>을 개정하여 이를 일부 완화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망우리 공동묘지도 경성부민들의 묘지 공간 부족에 대응하여 1933년에 신설된 공설묘지이다. 일제강점기에 경성부가 조성한 공설묘지 중 지금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묘지이기도 하다.

최초의 사설 공원묘지인 마석모란공원묘지는 196112월 제정된 <매장등및장사등에관한법률>(약칭 : 장사법)에 근거하여 탄생하였다. 이 시기 <장사법>이 새로 제정된 이유는 65만 평에 이르는 망우리 공동묘지가 만원에 이르고 있음에도 묘지의 수요는 날로 늘어나고 있는 현실에서 공설묘지 만으로는 대처하기 힘들다는 판단이 개입되었던 탓으로 보인다.

 

마석모란공원에 민족민주열사묘역이 들어서게 된 배경

 

민족민주열사는 해방이후 자신의 목숨을 역사의 제단에 바치면서 우리 사회의 시대적 과제인 자주·민주·통일을 위해 헌신해온 분들이다. 따라서 대한민국이 진정 헌법에 명시하고 있듯이 명실상부한 민주공화국이었다면 애당초 국가수준에서 민족민주열사의 무덤이 조성되고 관리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당기간 우리 사회를 주도한 독재정권은 민족민주열사의 죽음을 외면해 왔고, 심지어 은폐하기조차 했다. 민족민주열사의 무덤을 민간차원에서 조성하고 관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그나마 4·19민주묘지, 3·15민주묘지, 망월동5·18묘지 등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과정에서 국립묘지로 승격되었고, 2016년에는 비록 국립묘지는 아니지만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에 근거하여 비록 국립묘지는 아니지만 이천민주공원이 새로 조성되기도 했다.

 

국립묘지의 역사는 1900년 대한제국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황제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는 방편의 하나로 지금의 장충단공원 자리에 홍계훈과 이경직 등 갑오년(1894)과 을미년(1895)충신들을 충의열사로 기리는 장충단을 쌓고 매년 제사를 지냈다.

 

일제에 의해 박문사, 이토 히로부미와 육탄3용사의 동상 등이 설치되었던 장충단공원은 해방이후 장소의 상징성을 살리고자 했던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순국선열(독립운동가)을 봉안하는 장소로 다시 추진되었다.

 

하지만 분단 현실을 핑계 삼은 이승만에 의해 대한민국이 정식으로 수립된 이듬해인 1949년부터 위국진충의 영령과 신생 대한민국의 수호신들의 영령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제단을 설치하고 () 순국장병의 영령을 봉안하는 장충사가 설립되었다. 이곳에는 25 한국전쟁 직전까지 38선 일대와 지리산 등에서 숨진 군인과 경찰 2~8천여 기가 모셔졌다고 한다.

반독재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돌아가신 민족민주열사는 처음에는 공동묘지나 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 진보당 사건의 조봉암(1898-1959)은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고,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김주열 열사(1943-1960)와 한·일회담반대투쟁 과정에서 돌아가신 김중배 열사(1945-1965)는 고향인 전북 남원과 충북 충주의 선영에 각각 안장되었다.

 

마석모란공원에 민족민주열사가 안장되기 시작한 것은 망우리 공동묘지가 포화상태에 이른 시점에서 서울시가 1966년에 마석모란공원을 최초의 사설 공원묘지로 승인했다는 사정이 그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최초로 안장된 민족민주열사,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의 권재혁 선생

 

마석모란공원에 최초로 안장된 민족민주열사는 권재혁 선생(1925-1969)이었다.

 

육군사관학교 교수를 지내기도 한 권재혁 선생은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치하에서 노동운동에 기반한 혁명을 꿈꾸며 동지들과 함께 비밀 써클 활동을 한 인물이었다. 그는 통혁당 사건이 발발했을 때 통혁당과 교류한 사실이 정보기관에 포착되면서 1969년에 동지들과 함께 연행되었다. 그는 남조선해방전략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조작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권재혁 선생은 재심을 통해 2014년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되었다. (탤런트 권재희가 권재혁 선생의 딸이다.)

 

그런데 우리는 한동안 권재혁 선생이 마석모란공원에 안장되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마석모란공원, 전태일 열사가 잠든 곳

 

19701113일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1948-1970)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라고 외치며 분신한 사건은 우리 사회 민주화운동이 기층 민중에 기반해야 한다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제시하였다. 이후 전태일 열사는 노동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자리 잡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석모란공원은 이때부터 전태일 열사가 잠든 곳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전태일 열사의 마석모란공원 안장은 이곳이 민족민주열사묘역으로 자리 잡는 과정의 실질적인 출발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2의 전태일로 불린 김진수 열사와 박영진 열사, 전태일 열사 곁에 잠들다

 

김진수 열사(1949-1971)는 전태일 열사의 분신에 영향을 받아 설립된 한영섬유노조를 사수하기 위한 투쟁과정에서 구사대의 폭력으로 숨진 인물이다. 19715월 사망 당시 제2의 전태일로도 불렸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적극적 주선한 탓에 김진수 열사의 묘는 원래 전태일 열사 묘 바로 옆에 나란히 안장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경찰의 방해로 전태일 열사 묘와는 거리가 있는 주차장 근처에 안장되었다.

 

1986년 임투 과정에서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신흥정밀 건물 옥상에서 분신하여 숨진 박영진 열사(1960-1986) 역시 이소선 어머니의 주선 탓에 자신이 평소 가장 존경했던 전태일 열사와 나란히 안장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경찰의 방해로 마지막 상여가 놓여있던 지금의 자리에 안장되었다.

 

마석모란공원에 안장된 최초의 학생열사, 박래전

 

분신 당시 숭실대학교 인문대 학생회장이던 박래전 열사(1963-1988)6월 민주항쟁(1987)이후 광주청문회를 앞둔 19886, “광주는 살아있다, 군사파쇼 타도하자!”고 외치며 옥상에서 분신한 학생열사이다.

 

박래전 열사의 장지는 원래 광주 망월동묘지나 학교 동산이 검토되었는데, 이소선 어머니의 제안과 권유 탓에 마석모란공원으로 결정되었다. 박래전 열사의 마석모란공원 안장은 박종철 열사(화장 후 경기도 고양의 한강 샛강에 뿌려진 다음, 1989년에 허묘 조성)를 비롯한 학생열사들이 마석모란공원에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1997년의 모란공원 민주열사추모비 건립, 명실상부한 민족민주열사묘역이 되다

 

민족민주열사들의 유가족단체인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1997년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모란공원 민주열사추모비를 건립하였다.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을 뒤늦게나마 추인한 것이다. 설계와 조각은 민중미술가 홍성담이 맡았고, 서해성의 글을 박용길과 신영복의 글씨로 새겨 넣었다.

 

만인을 위한 꿈을 하늘 아닌 땅에서 이루고자 한 청춘들 누웠나니, 스스로 몸을 바쳐 더욱 푸르고 이슬처럼 살리라던 맹세는 더욱 가슴 저미누나. 의로운 것이야말로 진실임을, 싸우는 것이야말로 양심임을 이 비 앞에 서면 새삼 알리라. 어두운 세상 밝히고자 제 자신 바쳐 해방의 등불 되었으니 꽃 넋들은 늘 산 자의 빛이요 볕뉘라. 지나는 이 있어 스스로 빛을 발한 이 불멸의 영혼들에게서 삼가 불씨를 구할 지어니.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은 국가가 아닌 시민사회의 자발적 노력으로 조성된 묘역이라는 점에서도 세계사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특별한 묘역이다. 아울러 마석 민족민주열사묘역의 경험을 발판으로 양산 솥발산 열사묘역, 대구 현대공원 통일열사묘역, 천안 풍산공원묘지 열사묘역 등 지역별 특색을 갖춘 민족민주열사 묘역이 조성되고 있다는 점 역시 주목해 볼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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