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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이야기 ②

작성자 추모연대 등록일 2023-05-16 조회수 67회 댓글수 0건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이야기 ②
- 전태일 열사를 시작으로 마석모란공원에 잠든 노동 열사 


김학규 추모연대 교육위원장


사설묘역인 마석모란공원에 민족민주열사묘역이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데에는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묘를 시작으로 1971년의 김진수 열사의 묘가 들어선 이래 1986년 박영진 열사의 묘가 들어선 것이 중요한 구실을 했다. 

전태일 열사의 묘에 이어 김진수 열사의 묘와 박영진 열사의 묘가 연이어 마석모란공원에 자리 잡게 된 것은 ①편에서도 언급했듯이 유족과 관계자들을 설득한 이소선 어머니의 역할이 컸다. 

②편에서는 전태일 열사의 묘(1970), 김진수 열사의 묘(1971), 박영진 열사의 묘(1986)가 마석모란공원에 들어서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전태일 열사와 이소선 어머니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하던 노동자 전태일(1948-1970)의 분신은 우리 사회 민주화운동이 기층 민중에 기반해야 한다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제시한 사건이었다. 이후 학생운동과 재야 민주화운동도 기층 민중에 기반한 운동으로 방향 정립을 하게 되었고, 전태일 열사는 노동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자리 잡은 채 2020년 50주기를 맞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 만들어진 청계피복노동조합은 1970-80년대 민주노조의 상징 역할을 했다. 매년 양대 노총은 열사의 기일인 11월 13일에 맞춰 열사의 정신을 기리는 노동자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전태일 열사가 있던 평화시장 근처에는 전태일 다리가 있고, 2019년에는 전태일기념관이 개관하였다. 전태일기념관에는 전태일 열사의 일기도 전시되어 있는데, “오늘 같은 내일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대목에서는 현실의 난관을 반드시 헤쳐 나가고야 말겠다는 전태일의 단호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열사의 묘 근처에는 1970년 아들의 분신 이후 평생을 노동자 권익향상을 위해 헌신한 이소선(1929-2011) 어머니의 묘가 있다. 이소선 어머니는 전태일 열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들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아들의 시신을 가지고 가지 않겠다.”면서 단호하게 맞선 끝에 임금인상 등 8개 항목의 근로조건 개선과 청계피복노조 결성 약속을 받아낸 다음에야 장례식을 치렀다. 이후 이소선 어머니는 단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만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 역할을 했다. 

img.jpg전태일다리에 있는 전태일 동상img.jpg전태일기념관



제2의 전태일로 불린 ㈜한영섬유노조의 김진수 열사

사망 당시 제2의 전태일로 불리기도 했던 김진수(1949-1971)의 한이 서려 있는 스웨터 보세 가공공장 ㈜한영섬유는 신대방동에 있었다.

600명의 노동자가 일하고 있던 ㈜한영섬유에 노동조합이 만들어진 것은 1970년 12월 28일이었다. 당일 점심 식사를 마친 직후 식당에 모인 400여 노동자들은 회사의 감시를 따돌리고 식당 문을 걸어 잠근 채 기습적으로 전국섬유노조 서울의류지부 산하 한영섬유분회 결성식을 일사천리로 거행하였다. 

한영섬유 노동조합의 결성은 한 달 전 자신의 몸을 불살라 노동자의 열악한 현실을 세상에 알린 전태일의 충격적인 분신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한영섬유에는 전태일의 분신이 있기 전부터 김용욱, 고석민, 이장원, 장은수 등이 노조를 만들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전태일 분신 사건이 있은 얼마 후 이를 보도한 신문기사를 오려 동료들이 돌려볼 수 있도록 식당에 몰래 배포했다. 

1968년 8월 한영섬유에 입사한 김진수도 이때 이들이 배포한 신문 자료를 통해 전태일 분신 사건을 접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고, 평소 사용자의 횡포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어 있던 상황에서 민주노조 결성에 참여하여 열성 조합원이 되었다.

노조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았던 회사는 노조결성을 막지는 못했지만, 민주노조를 파괴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움직였다. 곧바로 직장 폐쇄 방침을 발표하면서 노동자들의 사직을 유도하는 한편, 다음 해 1월 4일에는 김용욱을 비롯한 노조 간부를 강제 해고하는 등 부당노동행위를 벌였다. 

김진수도 회사의 방침에 속아 다른 동료 200여 명과 함께 12월 31일자로 회사를 그만두었다가 노조의 진정으로 근로감독관이 “헌법에 보장된 노조활동을 인정하라”고 지시함에 따라 다음해 1월 10일 재입사 형식으로 다시 한영섬유에 들어왔다. 그럼에도 회사의 노조 파괴 책동은 멈추지 않았다. 

1971년 3월 18일, 오후 작업을 마친 직후에 이미 회사 근처 가게에서 소주, 포도주, 막걸리 등을 마셔 술에 취한 상태의 홍진기· 최홍인·정진헌 등 3인은 노조 일에 적극적이던 김진수에게 접근해 노조탈퇴를 종용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노조 탈퇴를 거부하는 김진수의 머리를 정진헌이 드라이버로 찔러 2.5cm가 머리에 박히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김진수는 직장동료에 업혀 급히 대림성심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려는 회사 측이 ‘공원끼리 다투다가 넘어졌다’고 거짓말을 하는 바람에 의사도 제때 손을 쓸 수 없었다.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긴 이후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병원 측은 2차에 걸쳐 뇌수술을 했지만, 이미 뇌 전체가 오염된 다음이었다. 결국 김진수는 두 달간 사경을 헤매던 중 5월 16일에 끝내 사망하고 말았다. 

이소선 어머니는 김진수의 어머니 윤길순을 만나 위로하면서 진상규명 투쟁에도 함께 했다. 6월 15일, 윤길순이 “내 아들 김진수를 누가 왜 죽였나” 라고 쓴 플래카드를 내걸고 광화문 연좌시위를 벌일 때도 이소선 어머니가 함께 했다. 

회사 측의 책임 회피로 제때에 치를 수 없었던 장례식은 결국 한 달이 넘은 6월 25일에야 치러졌다. 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 가톨릭학생연맹 등 종교단체들과 대학생이 가세하여 세브란스 병원에서 장례식을 치른 후, 김진수의 시신은 전태일이 묻혀 있는 마석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 관련 단체들은 장례식이 끝난 후에도 회사 측의 책임을 묻지 못한 것에 대한 한을 간직한 채 노동조합 활동 보장 등을 요구하는 만장을 들고 시위를 계속해야 했다.

img.jpg김진수열사의 묘소


 
박영진 열사의 죽음, 제2·제3의 전태일이 이어지다

박영진 열사(1960-1986)는 중학교를 중퇴하고 신문팔이, 구두닦이 등을 하면서 어린 시절부터 가난한 삶을 살았다. 그런 박영진 열사가 세상 문제에 눈뜨기 시작한 것은 23세에 뒤늦게 야학에 다니면서부터였다. 

㈜동일제강에서도 민주노조 건설의 핵심적 역할을 했던 박영진은 숨지기 6개월 전인 1985년 9월에 독산동에 있는 ㈜신흥정밀에 입사했다. 신흥정밀은 당시 부당노동 행위나 임금 착취가 심했던 곳으로 이에 조금만 항의를 해도 구타를 하거나 욕설을 퍼부으며 해고시키는 무법천지의 회사였다. 박영진은 동일제강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직 작업과 현장 실태 파악에 전력투구했다. 

1986년, 신흥정밀은 임금인상투쟁을 시작했고 공권력이 투입됐다. 그 과정에서 박영진은 경찰과 회사 측의 폭력적인 탄압에 맞서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살인적인 부당노동행위 철회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회사 옥상에서 분신했다. 박영진은 병원에서 “전태일 선배가 못다 한 일을 내가 하겠다. 1천만 노동자의 권리를 찾겠다. 끝까지 투쟁해야 한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운명했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주선으로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된 박영진 열사는 평소 가장 존경하던 전태일 열사의 옆에 안장될 예정이었지만, 무덤조차 마음대로 쓸 수 없게 한 경찰의 방해로 상여를 마지막으로 내려놓았던 자리에 안장될 수밖에 없었다. 

img.jpg박영진열사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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