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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이야기 ④

작성자 추모연대 등록일 2023-12-06 조회수 31회 댓글수 0건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이야기 ④

- 재야 민주화운동의 상징 문계백, 마석모란공원에 안장되다(2) 

김학규 추모연대 교육위원장

  민주화운동가들은 1980년대 재야운동의 연합체인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을 이끈 문익환(1918-1994), 계훈제(1921-1999), 백기완(1933-2021)을 문계백으로 불렀다. 세 사람의 성을 따서 한 사람인 양 부른 것이다. 문계백이 이끈 민통련은 전두환군사독재 시절인 1985년 3월 25개 재야 민주화운동 단체들이 연합하여 발족한 단체로 1987년의 5월에 야당까지 포괄하는 국본(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을 탄생시켜 6월 민주항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었다. 
  문계백 중 문익환의 묘를 소개한 지난 호에 이어 이번에는 계훈제의 묘를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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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줄 왼쪽부터 계훈제, 문익환, 백기완

 

‘재야의 거목’ 계훈제 선생, 마석모란공원에 안장되다


  1999년 3월 15일자 <경향신문>은 「‘재야의 거목’ 계훈제씨 별세」라는 제목으로 계훈제 선생의 서거 소식을 전했다. 문익환, 백기완과 더불어 문계백으로 불리면서 1980년대 재야운동을 이끌었던 계훈제 선생이 78세의 나이로 타계한 것이다. 시민사회는 장례위원회를 조직하여 ‘민족의 지도자 고 계훈제 선생 민주사회장’을 치르고, 선생의 유해를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했다.
 
  사실 ‘재야의 거목’ 계훈제 선생은 항상 흰 고무신에 작업복이나 낡은 바바리코트 차림의 소박한 모습으로 민주화운동의 현장을 누비던 인물이다. 선생은 일생 동안 단 한 차례도 구두를 신지 않았고, 넥타이도 매지 않았다고 한다. 계훈제 선생의 이런 차림새는 무명 두루마기에 흰 고무신만 신고 다니던 중학시절의 스승 심인곤 선생에게 받은 영향이 컸다. 민족의식이 투철하고 일제에 결코 굴복하지 않았던 심인곤 선생을 보면서 차림새가 사상과 직결된다는 생각이 형성되었고, 이를 스스로도 실천에 옮긴 결과이다.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도 전한다. 1970년대 초 장준하와 백기완이 흰 고무신을 강제로 벗겨내 던져버리고 구두를 사 준 일이 있었다. 그런데 계훈제 선생은 며칠 있다가 고무신을 다시 신고 온 선생은 “이것은 내 껍질을 벗는 것이요, 날마다 내 속을 채우는 상징”이라면서 “이 고무신을 다시는 벗길 생각을 말라!”고 못을 박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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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석 모란공원에 있는 계훈제 선생 묘소


평생 불의에 맞선 저항의 삶

  계훈제 선생은 평생 불의에 맞선 저항의 삶을 살다 간 인물이다. 계훈제 선생은 저항할 줄 모르면 사람도 아니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선생은 이미 “나는 나라는 자주성을 바탕으로 스스로 자유로이 행동하는 것”이 저항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여기에 “살아 있는 존재에 대한 저항을 억누를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존재는 있을 수 없다”는 철학적 신념도 가지고 있었다.   

  선생이 걸어온 저항의 삶은 1943년 일제의 학병 동원에 대한 거부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선생은 경성제대 법문학부 1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이때 일제를 위해 총알받이가 되라는 학병 강요를 받게 되었고, 어렸을 때부터 고향인 평북 선천에서 목격했던 국경을 넘나들던 독립군을 떠올리면서 ‘저항’을 위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찾아간다. 하지만 국경을 넘다 신의주에서 체포되었고, 평양 인근의 시멘트 제조공장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선생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민족해방협동단이라는 비밀결사에 가입하여 30m 길이의 가마솥 폭파 계획을 세운 다음 실행을 모색하던 중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정국에서 백범 김구를 지지하면서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나서게 된 것도 일제강점기에 시작한 불의에 맞선 저항의 연장이었다. 계훈제 선생의 반탁운동은 말하자면 자주성을 바탕으로 한 신탁통치 반대운동이었던 것이다. 이는 1946년 미군정이 경성대학과 여러 전문학교를 하나로 묶어 국립서울대학교를 설립한다는 방침에 맞선 ‘국대안 반대운동’에 앞장선 일, 김구의 남북협상노선을 지지하면서 삭발 투쟁을 벌인 일 등에서도 드러난다. 


 ‘3옥4피’, 계훈제의 민주화운동


  계훈제 선생의 저항의 삶은 이승만 독재정권 시기에는 늑막염과 폐결핵으로 장기간 투병생활을 하면서 한동안 현실화될 수 없었다. 하지만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한 봉우리인 4·19 혁명 직전에 투병을 끝내면서 다시금 저항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고, 4·19 혁명에 참여한 직후에는 교원노조를 결성하여 부위원장을 맡아 활동하기도 한다. 

  선생의 독재정권의 불의에 맞선 저항의 삶은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이후 본격화된다. 1962년의 ‘자유언론수호협의회’ 구성과 활동, 1963-64년의 굴욕적 한일회담반대투쟁, 1968년의 월남전 파병 반대운동, 1969년이 3선개헌 반대투쟁 등에 앞장선 것이다. 1970년에는 함석헌이 주도한 《씨ᄋᆞᆯ의 소리》 창간 과정에 참여하여 편집위원을 맡는데, 1960년 이미 장준하가 발행하던 《사상계》의 편집장을 맡았던 경험도 있었다.

  계훈제 선생의 불의에 맞선 저항의 삶은 1972년부터 시작된 박정희 유신독재와 이어진 전두환 군사독재에 맞서는 과정에서 세 차례의 투옥과 네 차례의 도피생활로 점철된다. 이를 계훈제 선생 스스로는 ‘3옥4피(三獄四避)’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1973년 민주회복국민회의 운영위원, 1977년 민주주의민족통일국민연합 운영위원 등으로 활동하던 유신독재 시기에는 1975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투옥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첫 옥살이를 하는 등 권력의 감시와 수배, 투옥의 삶이 계속 이어졌다. 1980년‘서울의 봄’ 당시에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15개월의 도피생활을 히야 했고, 1982년에 포고령 위반으로 투옥되었다.    
  1985년 감옥에서 나온 계훈제 선생은 제5공화국 시절 내내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부의장 등을 밭아 민주화투쟁을 이끌었는데, 1987년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의 상임공동대표를 맡아 6월 민주항쟁을 이끌던 중 집시법 위반으로 또 다시 구속되었다. 

  6월 민주항쟁 후 치러진 1987년 대선에서 ‘군정종식을 위한 후보단일화론’ 입장을 주도했던 계훈제 선생은 노태우의 당선으로 귀결되는 좌절을 겪으면서도 다시 일어나 자주·민주·통일국민회의 공동의장과 전민련과 전국연합의 상임고문 등을 역임하며,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죽기 전까지 저항의 끈을 놓지 않았다. 계훈제 선생은 “남북통일이 되면 만들겠다”면서 평생 주민등록증을 만들지 않고 산 것으로도 유명하다. 


계훈제의 묘와 계훈제의 흉상, 마을극장 흰고무신


  계훈제 선생은 1995년 이후 그를 괴롭혀온 폐질환이 악화되면서 또 다시 병마와 싸워야 했고, 1999년 3월 14일 결국 운명하고 말았다. 병상에서도 나라를 먼저 걱정하던 선생은 자서전 《나의 투쟁, 나의 일생》(가제)을 집필하기도 했으나, 끝내 마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미완의 자서전은 《흰고무신》이라는 제목으로 2002년에 출판되었다. 도봉구는 2018년에 계훈제 선생이 살던 방학2동 집터에 마을극장 흰고무신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마석모란공원에 조성된 선생의 묘소는 <민주열사추모비> 제단 바로 옆에 있는데, 2018년에 돌아가신 부인 김진주 여사와 함께 안장되어 있다. 묘소 옆에 세워져 있는 흉상이 평생을 흔들림 없이 저항의 삶을 살아온 생전의 계훈제 선생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img.jpg자주·민주·통일국민회의 사무실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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