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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이야기 ⑤

작성자 추모연대 등록일 2024-03-08 조회수 36회 댓글수 0건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이야기 ⑤
- 재야 민주화운동의 상징 문계백, 마석모란공원에 안장되다(3) 


김학규 추모연대 교육위원장


민주화운동가들은 1980년대 재야운동의 연합체인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을 이끈 문익환(1918-1994), 계훈제(1921-1999), 백기완(1932-2021)을 문계백으로 불렀다. 세 사람의 성을 따서 한 사람인 양 부른 것이다. 문계백이 이끈 민통련은 전두환군사독재 시절인 1985년 3월, 25개 재야 민주화운동 단체들이 연합하여 발족한 단체로 1987년의 5월에 야당까지 포괄하는 국본(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을 탄생시켜 6월 민주항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었다. 
문계백 중 문익환의 묘와 계훈제의 묘를 두 차례에 걸쳐 소개한 데 이어 이번에는 백기완의 묘를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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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줄 왼쪽부터 계훈제, 문익환, 백기완

마석모란공원에 마련된 <임을 위한 행진곡> 원작자 ‘백기완의 묻엄’

우리가 가장 많이 부르는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 가사의 원작이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2021년 2월 15일 백기완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언론은 ‘백발의 투사’, ‘거리의 투사’. ‘혁명 꿈꾼 로맨티스트’, ‘노나메기 세상 꿈꾼 영원한 청년’, ‘영원한 민중의 벗’, ‘민주화·통일운동 큰 별’, ‘통일·민주화운동의 거목’, ‘<임을 위한 행진곡> 원작자’, ‘민중운동가’, ‘통일운동가’, ‘혁명가’와 같은 다양한 수식어를 동원하면서 선생의 별세 소식을 알렸다. 

같은 해 4월 6일, 마석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에 안장된 선생의 묘 앞에서 진행된 49재에 맞춰 ‘새김돌 세우는 날’(묘비 제막식) 행사가 진행되었는데, 앞면에는 ‘백기완 묻엄’이라고 새겼고, 뒷면에는 선생이 생전에 직접 쓴 <임을 위한 행진곡> 도입부의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 백기완’라는 문구를 새겨 넣었다. 

새김돌 앞면에 새긴 ‘백기완 묻엄‘은 백범 김구의 부인 최준례 여사의 무덤에 새겨진 한글학자 김두봉이 쓴 ’최준례 묻엄‘을 참고한 것으로 생전에 우리말을 지극히 사랑한 선생의 뜻을 되새기고자 하는 후배들의 갸륵함이 묻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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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석 모란공원에 있는 백기완 선생 묘소


한일협정 반대운동을 계기로 재야 민중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백기완

황해도 은율 출신의 백기완은 해방 이후 월남하여 서울에 정착하였다. 백기완은 초등학교 이외의 정규교육과정을 거치지 않았고 독학으로 공부했음에도 그 누구도 범접하기 힘든 놀라운 식견을 갖춘 인물이었다. 

분단의 아픔을 그 누구보다도 첨예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실향민이다 보니 일찍이 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백기완이 본격적으로 재야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것은 1964~65년에 걸쳐 일어났던 한일협정 반대운동에 함석헌·계훈제 등과 함께 참여하면서부터였다. 백기완은 1950년대부터 농촌계몽운동, 녹화사업, 신생활운동 등을 벌여왔는데, 1960년의 4·19혁명을 계기로 정치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백기완은 그해 치러진 7·29총선에서는 용산구에서 무소속으로, 1967년의 6·8총선에서는 영등포갑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하기도 했다.  

백기완이 재야 민주화운동의 기반으로 삼은 백범사상연구소를 설립한 것은 1972년 8월이었다. 백범 김구 선생의 “①항일투쟁혁명노선의 사료를 수집·체계화하고, ②한 주체적 인간과 그 사상의 연구를 통하여 자주적인 진보지향과 민족사상의 진원 맥락을 캐고, ③백범의 애국사상을 널리 전파하고 이를 전진하는 민족의지로 발전시키는 것을 연구목적으로 삼는다.”고 했지만, 사실은 이때도 연구소의 이름을 통일문제연구소로 삼고자 했다고 한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이 이를 허락하지 않아 부득이 백범사상연구소로 이름을 정했다고 한다. 백범사상연구소는 1984년에 통일문제연구소로 재탄생했다. 

반유신 투쟁의 선봉에 선 백기완, 긴급조치 위반 1호 인사가 되다

백기완이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고초를 겪기 시작한 것은 1972년 유신헌법 통과와 함께 들어선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이었다. 장준하와 더불어 유신헌법 철폐 백만인 서명운동을 펼치던 백기완은 1974년 1월 15일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군사재판에서 징역 12년 형을 선고받은 것이다. 이 일로 백기완은 1975년 2월 17일 형집행정지로 풀려날 때까지 옥고를 치러야 했다.

수시로 중앙정보부의 감시와 연행이 거듭되는 삶을 살던 백기완이 다시 구속된 것은 1979년11월 24일에 있었던 ‘YWCA 위장결혼식 사건’때문이었다. 때는 10·26사건으로 독재자 박정희가 살해되고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최규하가 대중의 민주화 열망을 수용하여 민주화 일정을 제시하기는커녕 유신헌법에 근거하여 또 다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새 대통령을 뽑겠다는 담화를 발표한 직후였다. 이날 백기완은 함석헌 등 재야인사들과 함께 일체의 집회를 허용하지 않는 계엄령 상황임에도 결혼식을 한다는 명목으로 명동 YWCA회관에 모여 ‘통대 저지를 위한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민주화를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 사건으로 백기완을 비롯한 140명의 재야인사가 보안사에 연행되어 수사를 받아야 했고, 백기완은 평소 80kg이 넘던 건장한 체격이 38kg의 왜소한 체구로 줄어들 정도로 전두환 신군부세력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결국 1년 6월의 징역형을 선고 받은 백기완은 심각한 고문 후유증으로 1980년 5월 13일에 병보석으로 출감할 수 있었고, 각고의 노력 끝에 겨우 기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후 백기완은 1983년에 결성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의 부의장을 1988년까지 지냈다. 이 기간 중 1986년에는 '부천서 성고문 폭로 대회'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고,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승리로 이끈 국본(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발기를 민통련 부의장 자격으로 주도하기도 했다.  

민중후보 백기완

백기완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성과로 쟁취한 대통령 직선제가 포함된 ‘87 헌법’에 근거하여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 두 차례 민중후보로 출마한 이력도 가지고 있다. 

1987년의 6월 민주항쟁 직후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재야 민주화운동은 비판적 지지론, 후보단일화론, 민중독자후보론으로 갈라져 대응한 아픔을 안고 있다. 이때 재야 민주화운동의 지도자 문계백도 셋으로 갈라졌다. 비판적 지지론의 문익환, 후보단일화론의 계훈제, 민중독자후보론의 백기완으로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한 것이다. 

이때 백기완은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와 민주연립정부를 통한 군정종식의 기치를 내건 민중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직접 출마하였다. 백기완은 20만이 집결한 12·12 대학로 유세집회와 처음으로 실시된 TV연설을 한 칼에 녹음한 신화 등을 남겼지만, 군정종식을 위한 단일화 논의가 끝내 실패하자 양김의 후보단일화를 호소하며 사퇴하고 말았다. 

백기완은 5년 후인 1992년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도 민중후보로 다시 출마하였지만, 의미있는 성과를 만들어내는 데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백기완의 후예들은 2000년에 민주노동당을 창당하면서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한 단계 진전된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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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대통령선거 출마 후 연설 중인 백기완 선생 (사진출처 : 경향신문)


생의 마지막까지 민중과 함께 한 백기완     

백기완은 두 차례의 대선을 치른 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면서 통일운동과 민중운동에 전념하였다. 이 기간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초대회장, 전노협 고문, 장준하선생 암살진상규명위원회 공동대표, 민족문화대학설립위원회 대표, 한양대 겸임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이시기 백기완에 붙은 새로운 별명은 ‘거리의 투사’, ‘백발의 투사’라는 호칭이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비정규직 노동자와 해고 노동자들의 투쟁이 본격화될 때, 백기완은 전국의 투쟁현장으로 달려가 연대하고 “기죽지 마라”면서 용기를 북돋우는 특유의 감동적인 연설을 계속했다. 이라크 파병 반대운동, 한미자유무역협정(FTA) 반대운동, 용산참사 투쟁, 한진중공업사태 해결을 위한 희망버스 탑승운동, 밀양 송전탑 반대운동, 이명박 정권퇴진운동에 앞장섰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관련 촛불항쟁에는 여든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 꾸준히 참석했다.

백기완은 문계백의 마지막 남은 인물답게 생의 마지막까지 민중과 함께 했고, 이 나라의 민주와 통일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었다. 

백기완노나메기재단과 백기완기념관

“백기완이란 이름은 한국 근현대 역사에서 저항의 상징이다. 탁월한 민중사상가이자 사회혁명가였던 그의 한살매는 숨가쁘게 내달려 온 격동의 한국현대사 자체였다.”

백기완의 뜻을 이어가고자 만들어진 백기완노나메기재단(이사장 신학철) 창립 선언문의 첫 문장이다. 백기완노나메기재단은 1주기를 앞둔 2022년 2월 8일에 창립되었다. 노나메기 재단은 “분단모순과 제국주의, 독점자본의 야만에 온몸으로 앞서서 투쟁하면서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너도 잘살고 나도 잘살되, 올바로 잘사는 노나메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실천해 온 백기완 선생의 뜻을 이어가겠다.”고 선언했다. 노나메기연구소라는 부설 연구소도 만들어져 활동 중이다. 

명륜동의 통일문제연구소를 백기완기념관으로 재건축하자는 제안은 2주기를 앞두고 두고 나왔고, 노동계를 비롯한 각계의 성금이 모이고 있다. 이미 이름을 바꾼 백기완기념관이 조만간 감동적인 모습으로 그 위용을 새롭게 드러낼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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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13일, 백기완 선생이 세종호텔 노조의 투쟁을 지지하는 시민사회단체 기자회견이 시작되기 전 제일 먼저와서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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