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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이야기 ⑥

작성자 추모연대 등록일 2024-05-04 조회수 19회 댓글수 0건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이야기 ⑥

- 박래전, 학생 열사 중 처음으로 마석모란공원에 안장되다  


김학규 추모연대 교육위원장


“광주는 살아 있다, 군사파쇼 타도하자!”


박래전 열사(1963-1988)는 분신 당시 숭실대학교 인문대 학생회장이었다. 열사가 분신한 1988년 6월 4일은 ‘80년 광주의 진실’이 청문회를 통해 밝혀질 수 있을지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1987년 대선에서 노태우가 당선되었음에도 이어진 1988년의 4·26 총선의 결과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었고, 국회법을 개정하여 5·18민주화운동의 진실과 5공 비리를 밝히기 위한 ‘광주특위’와 ‘5공특위’를 구성하여 국회 청문회(광주청문회와 5공청문회)를 개최하자는 논의가 한창이던 시기였던 것이다.  


이때 박래전이 “광주는 살아있다!”, “청년학도여! 역사가 부른다, 군사파쇼 타도하자!”라는 구호와 함께 숭실대 학생회관 옥상에서 분신하였다. ‘학살원흉의 한 명인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있는 상황에서 국회에서 특위가 만들어지고 청문회가 개최된다 한들 ‘80년 광주의 진실’을 제대로 밝힐 수 없으니 청년학도가 단결하여 군사파쇼를 타도해야 한다‘는 점을 자신의 몸을 불사르면서까지 세상에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박래전은 분신한 직후 한림대학교한강성심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다. 하지만 이미 전신 80% 3도 화상을 입은 상태였고, 이틀 후인 6월 6일 12시 23분 끝내 숨지고 말았다. 이때 박래전은 25살의 꽃다운 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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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석모란공원에 처음 안장된 학생 열사


박래전 열사의 장지는 광주 망월동 묘역과 숭실대 교정 등이 검토되었으나,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인 이소선 여사의 적극적인 제안에 힘입어 마석모란공원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이소선 여사는 앞서 노동 열사인 김진수와 박영진이 마석모란공원 전태일 열사 곁에 안장되는 데에도 결정적 역할을 한 바 있었다. 


학생 열사인 박래전이 1988년에 마석모란공원에 안장되면서 마석모란공원은 민족민주열사묘역의 면모를 본격적으로 갖추기 시작했다. 박래전 열사의 묘역이 들어서기 전까지 마석모란공원에 안장되어 있는 열사는 전태일, 김진수, 박영진 등 노동열사 뿐이었다. 이후 박종철 열사 등 학생 열사가 마석모란공원에 안장되는 것도 박래전 열사의 마석모란공원 안장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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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되고자 했던 박래전


박래전 열사는 원래 시인이 되고자 했던 인물이다. 열사는 살아생전에 <반도의 노래>, <바람일 수는 없다>를 비롯한 다수의 시를 남겼고, 열사가 돌아가신 이후 유고시집 『반도의 노래』(세계, 1988)가 발간되었다. 박래전이 남긴 시 중에는 열사의 필명이기도 했던 대표작 <동화(冬花)’>가 제일 유명하다. 마치 열사 자신의 운명을 예견한 듯한 작품이다.


   <동화(冬花)>

               박래전


당신들이 제게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아는 까닭에

저는 당신들의 코끝이나 간지르는

가을꽃일 수 없습니다


제게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아는 까닭에

저는 풍성한 가을에도 뜨거운 여름에도

따사로운 봄에도 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떠나지 못하는 건

그래도 꽃을 피워야 하는 건

내 발의 사슬 때문이지요

겨울꽃이 되어버린 지금

피기도 전에 시들지 모릅니다

그러나 진정한 향기를 위해

내 이름은 冬花라 합니다


세찬 눈보라만이 몰아치는

당신들의 나라에서

그래도 몸을 비틀며 피어나는 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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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기도 전에 시들지 모르지만, 그래도 몸을 비틀며 피어나는 겨울꽃이 계속 살아남는 길은 빨리 봄이 오게 하는 것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봄이 오겠지만 그 봄이 제때 오지 못한다면 겨울꽃은 시들거나 얼어 죽을 수밖에 없다. 1919년 새로 부임해오는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1855-1920)가 사형집행을 앞두고 “단두대에 오르니 오히려 봄바람이 이는구나.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斷頭臺上 猶在春風。有身無國 豈無感想。)”라고 읊은 <절명시(絶命詩)>를 보는 듯하다. ‘봄’이 빨리 오기를 갈망했고, 자신의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도 그 ‘봄’이 반드시 올 것을 확신했다는 점에서 강우규 의사의 <절명시(絶命詩)>와 박래전 열사의 <동화(冬花)’>는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박래전의 대표시 <동화(冬花)’>는 숭실대 도서관 옆 <민중해방 열사 박래전 기념비> 뒷면에는 전문이, 마석모란공원 열사묘역 비문에는 일부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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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전이 옳았다, 새롭게 주목받은 박래전 열사


박래전 열사는 2017년 5월 18일 광주 5·18민주묘역에서 열린 5·18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식에서 당시 대통령 문재인의 기념사에 등장하면서 다시 한 번 주목 받았다. 문재인 당시 대통령은 “1982년 광주교도소에서 광주진상규명을 위해 40일 간의 단식으로 옥사한 스물아홉 살, 전남대생 박관현”, “1987년 ‘광주사태 책임자 처벌’을 외치며 분신 사망한 스물다섯 살, 노동자 표정두”, “1988년 ‘광주학살 진상규명’을 외치며 명동성당 교육관 4층에서 투신 사망한 스무네 살, 서울대생 조성만”과 함께 “1988년 ‘광주는 살아있다’ 외치며 숭실대 학생회관 옥상에서 분신 사망한 스물다섯 살, 숭실대생 박래전”을 호명하며 “국가가 책임을 방기하고 있을 때, 마땅히 밝히고 기억해야할 것들을 위해 자신을 바쳤다”고 말했다. 


박래전 열사는 그로부터 4년 후인 2021년에는 6월 민주항쟁 34주년에 즈음하여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점을 인정하여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받기도 했다.


이즈음 박래전 열사가 주목받은 이유는 40년이 지난 상황임에도 헬기 기총소사나 계엄군의 성폭력 문제는 고사하고, 가장 기본적인 발포 책임자 규명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다보니 ‘오월 광주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5·18특별법 개정과 5·18진상조사위원회 활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1988년 광주특위 활동에 근거한 ‘광주청문회’는 ‘오월 광주의 진실’을 대중적으로 널리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전두환-노태우 신군부 세력이 치밀한 사전 준비를 통해 ‘오월 광주의 진실’을 조직적으로 은폐한 탓에 그 한계 또한 뚜렷했다. 이러한 한계는 1995년 12월 21일에 제정된 5·18특별법과 그에 근거한 전두환-노태우 신군부 세력에 대한 처벌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020년부터 본격 활동을 개시한 5·18진상조사위원회가 4년간 새롭게 활동을 벌였음에도 여전히 진상규명이 미진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것도 신군부 세력의 조직적 은폐를 돌파할 확실한 무기를 만들어내지 못한 탓이다.


이러한 현실은 박래전 열사가 자신의 몸을 불사르면서 “광주는 살아있다!”, “청년학도여! 역사가 부른다, 군사파쇼 타도하자!”라고 외쳤던 문제의식이 기본적으로 옳았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오월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온몸을 던진 열사들


‘오월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사른 열사는 박래전 만이 아니었다. 1980년 5월 광주가 군홧발에 끝내 짓밟힌 지 3일 만인 5월 30일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작성한 후 종로5가 기독교회관 6층에서 자신의 몸을 던진 김의기 열사(서강대생)를 시작으로 김종태 열사(1980), 김태훈 열사(1981, 서울대생), 박관현 열사(1982, 전남대생), 송광영 열사(1985, 경원대), 홍기일 열사(1985), 강상철 열사(1986), 표정두 열사(1987), 황보영국 열사(1987), 박태영 열사(1987, 목포대), 최덕수 열사(1988, 단국대), 조성만 열사(1988, 서울대), 김병구 열사(1989)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특히 단국대생 최덕수 열사의 분신은 박래전 열사의 분신이 있기 불과 9일 전에 일어났고, 장례식에 참석했던 박래전 열사가 분신을 결심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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