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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묘역교육자료]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탐방

작성자 추모연대 등록일 2019-11-14 조회수 1,799회 댓글수 1건

본 기고글은 지난 11월 1일(금),  남양넥스모 노동조합에서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을 탐방할 때 교육자료로 제공한 글입니다. 이날 묘역 탐방은 두개조로 나눠서 진행했으며, 안내 강사로는 김학규 교육위원장, 임영순 사무처장이 수고해 주었습니다.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탐 

김학규(추모연대 교육위원장)


1.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의 역사


1) 마석모란공원, 남한 최초의 사설 공원묘지


 마석모란공원은 1966년 조성된 한국 최초의 사설 공원묘지이다.
 개인묘지(종중묘지 포함)와 공동묘지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운영되던 시대에서 제도로서의 공동묘지로 정비된 것은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묘지·화장·화장장에 관한 취체규칙>을 제정한 1912년부터였다. 이 <취체규칙>에 따르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개인묘지의 설치를 일절 인정하지 않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는 조상숭배·존속존중 관념에서 나온 개인묘지에 대한 욕구가 강했던 조선인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1918년부터는 <취제규칙>을 개정하여 이를 일부 완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13년 당시 경성부에 설치된 공동묘지는 신당리·미아리·이문동·이태원·만리동 등 19개소에 달하였다.
 우리에게 익숙한 망우리공동묘지도 경성부민들의 묘지 공간 부족에 대응하여 1933년에 신설된 공설묘지이다. 일제강점기에 경성부가 조성한 공설묘지 중 지금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묘지이다.
 최초의 사설 공원묘지인 마석모란공원묘지는 1961년 12월 제정된 <매장등및장사등에관한법률>(약칭 : 장사법)에 근거하여 탄생하였다. 이 시기 <장사법>이 새로 제정된 이유는 65만평에 이르는 망우리공동묘지가 ‘만원’에 이르고 있음에도 묘지의 수요는 날로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 대한 대처 필요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2) 마석모란공원에 민족민주열사묘역이 들어서다


 민족민주열사는 해방이후 자신의 목숨까지 역사의 제단에 바치면서 우리 사회의 시대적 과제인 자주·민주·통일을 위해 헌신해온 분들이다. 따라서 대한민국이 헌법에 명시되어 있듯이 진정한 민주공화국이었다면 애당초 국가수준에서 민족민주열사의 무덤이 조성되고 관리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를 상당기간 주도한 독재정권은 민족민주열사들의 죽음을 은폐하고 외면해왔다. 따라서 민족민주열사의 무덤은 민간차원에서 조성되고 관리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4·19민주묘지, 3·15민주묘지, 망월동5·18묘지 등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과정에서 국립묘지로 승격되었고, 2016년에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에 근거하여 (비록 국립묘지는 아니지만) 이천민주공원이 새로 개관되기도 했다.1) 
 반독재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돌아가신 민족민주열사는 처음에는 공동묘지나 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 진보당 사건의 조봉암(1898-1959)은 망우리공동묘지에,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김주열 열사(1943-1960)와 한일회담반대투쟁 과정에서 돌아가신 김중배 열사(1945-1965)는 고향인 전북 남원과 충북 충주의 선영에 각각 안장되었다.
 마석모란공원에 민족민주열사가 안장되기 시작한 데에는 망우리공동묘지가 포화상태에 이른 시점에서 서울시가 1966년에 마석모란공원을 최초의 사설 공원묘지로 승인한 것이 그 배경이 되었다.          


⓵ 최초로 안장된 민족민주열사,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의 권재혁 선생 

 마석모란공원에 최초로 안장된 민족민주열사는 권재혁 선생(1925-1969)이었다. 육군사관학교 교수를 지내기도 한 권재혁 선생은 박정희군사독재정권 치하에서 노동운동에 기반한 혁명을 꿈꾸며 동지들과 함께 비밀써클 활동을 하던 중 통혁당 사건의 여파로 1969년 연행되어 ‘남조선해방전략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조작되어 사형에 처해진 인물이다.2) 하지만 우리는 한동안 권재혁 선생이 마석모란공원에 안장되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⓶ 마석모란공원, 전태일 열사가 잠든 곳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1948-1970)이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고 외치며 분신한 사건은 우리 사회 민주화운동이 기층 민중에 기반해야 한다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제시하였다. 이후 전태일 열사는 노동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자리 잡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때부터 마석모란공원은 전태일 열사가 잠든 곳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전태일 열사의 마석모란공원 안장은 이 곳이 민족민주열사묘역으로 자리 잡는 과정의 실질적인 출발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⓷ 제2의 전태일 김진수 열사와 박영진 열사, 전태일 열사의 곁에 잠들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에 영향을 받아 설립된 한영섬유노조를 사수하기 위한 투쟁과정에서 구사대의 폭력으로 1971년 5월 숨진 김진수 열사(1949-1971)는 사망 당시 제2의 전태일로 불렸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적극적 주선으로 김진수 열사의 묘는 원래 전태일 열사 묘 바로 옆에 나란히 안장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경찰의 방해로 전태일 열사 묘와는 상당히 떨어져 있는 주차장 근처에 안장되었다.
 1986년 임투 과정에서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신흥정밀 건물 옥상에서 분신하여 숨진 박영진 열사 역시 이소선 어머니의 주선으로 자신이 평소 가장 존경했던 전태일 열사와 나란히 안장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역시 경찰의 방해로 마지막 상여가 놓여있던 지금의 자리에 안장되었다.


⓸ 마석모란공원에 안장된 최초의 학생열사 박래전 

 분신 당시 숭실대 인문대 학생회장이던 박래전 열사(1963-1988)는 6월 민주항쟁(1987)이후 1988년 광주청문회를 앞둔 상황에서 학살원흉의 한 명인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있는 상황에서 진행되는 국회 청문회는 ‘광주의 진실’을 제대로 밝힐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광주는 살아있다, 군사파쇼 타도하자!”고 외치며 옥상에서 분신한 학생열사이다.
 박래전 열사의 장지는 원래 광주 망월동묘지나 학교 동산을 검토했는데, 이소선 어머니의 제안과 권유로 마석모란공원으로 결정되었다. 박래전 열사의 마석모란공원 안장은 박종철 열사(화장 후 임진강 샛강에 뿌려졌으나 1989년에 허묘 설치)를 비롯한 학생열사들이 마석모란공원에 자리 잡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⓹ 1997년의 모란공원 민주열사추모비 건립, 명실상부한 민족민주열사묘역이 되다     

 민족민주열사들의 유가족단체인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는 1997년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모란공원 민주열사추모비’를 건립하였다.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을 뒤늦게나마 추인한 것이다. 설계와 조각은 민중미술가 홍성담이 맡았고, 서해성의 글을 박용길과 신영복의 글씨로 새겨 넣었다. 


 “만인을 위한 꿈을 하늘 아닌 땅에서 이루고자 한 청춘들 누웠나니, 스스로 몸을 바쳐 더욱 푸르고 이슬처럼 살리라던 맹세는 더욱 가슴 저미누나. 의로운 것이야말로 진실임을, 싸우는 것이야말로 양심임을 이 비 앞에 서면 새삼 알리라. 어두운 세상 밝히고자 제 자신 바쳐 해방의 등불 되었으니 꽃 넋들은 늘 산 자의 빛이요 볕뉘라. 지나는 이 있어 스스로 빛을 발한 이 불멸의 영혼들에게서 삼가 불씨를 구할 지어니.”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은 국가가 아닌 시민사회의 자발적 노력으로 조성된 묘역이라는 점에서도 세계사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특별한 묘역이다. 아울러 마석 민족민주열사묘역의 경험을 발판으로 양산 솥발산 열사묘역, 대구 현대공원 통일열사묘역, 천안 풍산공원묘지 열사묘역 등 지역별 특색을 갖춘 민족민주열사묘역이 조성되고 있다는 점 역시 주목해 볼 대목이다.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소중한 자산이며, 한국현대사의 산 교육장이다.   


2.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탐방3)


▶ 탐방 코스
⓵박태순 열사 묘 → ⓶(노회찬 의원 묘) → ⓷박영진 열사 묘 → ⓸박래전 열사 묘 → ⓹전태일 열사 묘 → ⓺최종길 교수 묘 → ⓻김용균 열사 묘 → ⓼박종철 열사 묘 → ⓽김경숙 열사 묘 → ⑩문송면 열사 묘 → ⑪문익환 목사·박용길 장로 묘 → ⑫김태환 열사 묘 → ⑬최종범 열사 묘


⓵ 박태순 열사와 과거사기본법

 박태순 열사(1966-1992)는 학생운동(한신대 철학과)을 거쳐 노동현장에 투신한 노동운동가였다. 1980년대는 박태순만이 아니라 수천의 학생운동가들이 ‘노동자는 역사의 주인’이라는 인식하에 ‘노동해방’의 열망을 부여안고 노동현장으로 투신하던 시대였다.       
 박태순은 영등포고등학교 문학동아리 ‘흑향’에서 활동하는 등 고교시절부터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하며 사회인식의 폭을 넓혀나갔으며, 1985년 대학생이 된 이후에는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노동현장에 투신한 직후인 1989년에는 수원지검 점거농성 사건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고, 출옥 후 노동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1992년 8월 29일 부천 수영기계에서 근무 중 퇴근길에 실종되었다. 군에 입대한 동료들이 기무사에서 수사를 받고 있는 시점이었다. 2001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활동으로 시흥역에서 의문의 철도사고로 숨진 후 신원불명으로 처리되어 파주 용미리 무연고자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2002년에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지금의 자리에 안장되었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많은 분들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거나 실종되었지만,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등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진상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촛불혁명의 결과로 등장한 문재인 정부 하에서 과거사위원회의 재가동에 대한 요구가 계속되었다. 국회 행안위는 무려 2년이 지난 올해 10월 과거사기본법을 통과시켜 이제 본회의 상정을 눈앞에 두고 있다.
 박태순 열사 등 민주화운동과정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거나 실종된 분들의 억울함을 달래고 편안히 잠들게 하기 위한 과거사위원회의 활동을 기대한다.


⓶ 노동자-민중의 진보정당 건설에 앞장섰던 열사들
 민족민주열사묘역에는 노동자-민중의 이해를 대변하는 진보정당을 건설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헌신하다 돌아가신 분들이 여럿 있다. 지난 2018년 돌아가신 노회찬 정의당 의원을 비롯하여 차봉천 열사(2008), 이해삼 열사(2013), 박은지 열사(2014), 주경희 열사(2015), 오재영 열사(2017)가 그들이다.
 그런데 이들만이 아니다. 1960년 4·19혁명 이후 진행된 혁신정당운동을 주도하다 5·16쿠데타 이후 박정희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회당 조직부장 출신 최백근 선생(1913-1961)4), 마석모란공원에 최초로 안장된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의 권재혁 선생, 통혁당재건위 사건의 박기래 선생(1926-2012) 등도 진보정당운동을 벌인 분들로 분류할 수 있다.
 분단사회에서 진보정당운동은 곧바로 색깔론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진보정당운동 과정에서 많은 열사가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⓷ 박영진 열사의 죽음, 제2, 제3의 전태일이 이어지다
 박영진 열사(1960-1986)은 중학교를 중퇴하고 신문팔이, 구두닦이 등으로 어린 시절부터 어렵게 살아왔다. 박영진 열사가 세상문제에 대해 눈뜨기 시작한 것은 23세에 야학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동일제강에서도 민주노조 건설의 핵심적 역할을 했던 열사는 숨지기 6개월 전인 1985년 9월에 독산동에 있는 ㈜신흥정밀에 입사했다. 신흥정밀은 당시 부당노동 행위나 임금 착취가 심했던 곳으로 이에 조금만 항의를 해도 구타를 하거나 욕설을 퍼부으며 해고시키는 무법천지의 회사였다. 열사는 동일제강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직 작업과 현장 실태 파악에 전력투구했다.
 1986년, 신흥정밀은 임금인상투쟁을 시작했고 공권력이 투입됐다. 그 과정에서 열사는 경찰과 회사 측의 폭력적인 탄압에 맞서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살인적인 부당노동행위 철회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회사 옥상에서 분신했다. 열사는 병원에서 “전태일 선배가 못다 한 일을 내가 하겠다. 1천만 노동자의 권리를 찾겠다. 끝까지 투쟁해야 한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운명했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주선으로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되었다. 평소 가장 존경하던 전태일 열사의 옆에 안장될 예정이었지만, 경찰의 방해로 상여를 마지막으로 내려놓았던 자리에 안장되었다.


⓸ 박래전 열사, ‘광주의 진실’을 밝히려 했던 사람들
 박래전 열사(1963-1988)는 분신 당시 숭실대 인문대 학생회장이었다. 열사가 분신한 1988년 6월은 4·26총선의 결과 여소야대정국이 형성되면서 ‘80년 광주의 진실’이 청문회를 통해 밝혀질 수 있을지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열사는 “광주는 살아있다!”, “청년학도여! 역사가 부른다, 군사파쇼 타도하자!”고 외치며 옥상에서 분신하였다. ‘학살원흉의 한 명인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있는 상황에서 국회 청문회가 진행된들 ‘80년 광주의 진실’을 제대로 밝힐 수 없으니 청년학도가 단결하여 군사파쇼를 타도해야 한다‘는 점을 자신의 몸을 불사르며 세상에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박래전 열사는 시인이 되고자 했던 인물이다. 열사의 필명이기도 했던 대표작 <동화(冬花)’>는 마치 열사의 운명을 예견한 듯한 작품이다. 1919년 새로 부임해오는 사이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1855-1920)가 사형집행을 앞두고 쓴 <절명시>를 보는 듯하다.


당신들이 제게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아는 까닭에
저는 당신들의 코끝이나 간지르는
가을꽃일 수 없습니다


제가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아는 까닭에
저는 풍성한 가을에도 뜨거운 여름에도
따사로운 봄에도 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떠나지 못하는 건
그래도 꽃을 피워야 하는 건
내 발의 사슬때문이지요


겨울꽃이 되어 버린 지금
피기도 전에 시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진정한 향기를 위해
내 이름은 冬花라 합니다.


세찬 눈보라만이 몰아치는
당신들의 나라에서
그래도 몸을 비틀며 피어나는 꽃입니다


 ‘80년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사른 열사는 박래전만이 아니었다. 80년 광주가 군홧발에 끝내 짓밟힌 지 3일 만인 5월 30일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작성한 후 종로5가 기독교회관 6층에서 자신의 몸을 던진 김의기 열사(서강대생)를 시작으로 김종태 열사(1980), 김태훈 열사(1982, 서울대생), 박관현 열사(1982, 전남대생), 송광영 열사(1985, 경원대), 홍기일 열사(1985), 강상철 열사(1986), 표정두 열사(1987), 황보영국 열사(1987), 박태영 열사(1987, 목포대), 최덕수 열사(1988, 단국대), 조성만 열사(1988, 서울대), 김병구 열사(1989) 등의 죽음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80년 광주의 진실’은 전두환을 비롯한 가해자들의 침묵과 왜곡 속에 40주년을 눈앞에 둔 지금에도 여전히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80년 광주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5.18특별법>이 새로 시행된 지 1년을 훌쩍 넘기고 있지만, 가해자들을 승계한 자유한국당의 방해로 지난 1년여 동안 가동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법사위를 통과한 <5·19특별법> 개정안이 본회의를 통과하더라도 자유한국당이 위원 추천을 계속 거부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5·18특조위의 실제적인 활동은 여전히 요원할 수밖에 없다.  


⓹ 전태일 열사와 이소선 어머니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하던 노동자 전태일(1948-1970)의 분신은 우리 사회 민주화운동이 기층 민중에 기반해야 한다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제시한 사건이었다. 이후 학생운동과 재야 민주화운동도 기층 민중에 기반한 운동으로 방향 정립을 하게 되었고, 전태일 열사는 노동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자리 잡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 만들어진 청계피복노동조합은 1970-80년대 민주노조의 상징 역할을 했다. 매년 양대노총은 열사의 기일은 11월 13일에 맞춰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기리는 노동자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전태일 열사가 있던 평화시장 근처에는 전태일 다리가 있고, 2019년에는 전태일기념관이 개관하였다. 전태일기념관에는 전태일 열사의 일기도 전시되어 있는데, “오늘같은 내일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대목에서는 현실의 난관을 반드시 헤쳐 나가고야 말겠다는 전태일의 단호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열사의 묘 근처에는 1970년 아들의 분신 이후 평생을 노동자 권익향상을 위해 헌신한 이소선(1929-2011) 어머니의 묘가 있다. 이소선 어머니는 단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만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 역할을 했다.
 이소선 어머니는 전태일 열사 묘가 들어선 이래 김진수 열사, 박영진 열사, 박래전 열사의 묘가 마석모란공원 전태일 열사의 묘 근처에 자리 잡도록 하는 등 마석모란공원에 민족민주열사묘역이 자리 잡도록 하는 데 있어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⓺ 최종길 교수와 유신의 실체 

 최종길 교수(서울대 법대)는 유신독재가 본격화되고 있던 1973년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다 사망한 인물이다.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된 이후 1년간은 데모조차 할 수 없는 엄혹한 상황이었다. 유신이후 최초의 데모는 1973년 10월 2일 서울대생이 벌인 대규모 유신반대 시위였다. 이 시위이후 서울대생들이 대대적으로 연행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에 최종길 교수는 서울대법대교수회의에서 “지금 총장이 해야 할 일은 학생들을 나무랄 일이 아니고 문교부장관에게 항의하는 일이다.”라는 발언을 했고, 다음날 중앙정보부에 임의 출두 형식으로 끌려가 조사를 받던 중 3일 후인 10월 19일 고문으로 사망하였다. 하지만 중앙정보부는 “간첩이라는 사실을 시인하고 죄책감에 7층에서 투신자살했다”면서 최종길을 ‘유럽거점간첩사건’의 당사자 중 한 명으로 발표했다.
 최종길의 죽음에 대해서는 사건 직후부터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이 증거도 없이 간첩 혐의를 두고, 잠 안 재우기, 모욕, 심한 구타 등 고문을 통해 자백을 강요했다. 간첩으로 단정하는 일련의 문서는 사후에 작성되었으며, 현장검증도 조작했다. 감찰실 조사결과 차모씨 등에 의해 고문을 가한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보부는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했다.”면서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위법한 공권력 행사로 사망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최종길 교수 고문사 사건은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의 폭압성을 생생하게 웅변하는 사건의 하나였다.


⓻ 김용균 열사 묘, 비정규직 노동자와 산업재해 

 지난 2018년 12월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당시 24세)이 산재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열사의 죽음은 한국 사회에서 ‘죽음의 외주화’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열사의 죽음에 충격 받은 노동계와 시민사회가 함께 나서 시민대책위를 꾸리고 끈질기게 문제제기한 끝에 <산업안전법> 개정이 이루어지고 태안화력발전소에 대한 실태조사 약속을 받아내면서 김용균 열사의 장례식은 62일 만에 치러졌다. 김용균 열사의 죽음은 많은 이들에게 1988년 수은중독으로 사망한 노동자 문송면 열사(당시 15세)를 떠올리게 했다.
 김용균의 죽음에 직면하여 어머니 김미숙 씨의 용기 있는 행동과 헌신도 많은 이들을 감동시켰다. 김미숙 씨는 자식 잃은 아픔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한 채 “내가 이때까지 살아왔던 삶과는 다른 삶을 살겠다. 용균이와 비정규직 친구들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했고, 최근에 출범한 김용균재단의 대표도 맡았다. 이런 김미숙 씨의 모습에서 많은 이들은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에 직면하여 단호한 모습으로 나섰던 이소선 어머니’를 떠올리고 있다.


⓼ 영화 <1987>과 박종철 열사 

 영화 <1987>로도 유명한 박종철 열사(1965-1987)는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경찰의 물고문으로 스러져갔지만, 우리 사회 민주화의 결정적 분수령이 되었다고 평가되는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 역할을 한 인물이다.
 전 국민의 민주헌법과 직선제 개헌에 대한 요구를 외면하고 ‘호헌조치’를 통한 집권연장을 꿈꾸던 전두환-노태우 일당은 박종철의 의로운 죽음 앞에 당황한 나머지 처음에는 시신을 곧바로 화장 처리하여 증거를 없애려고 했다. 최환 공안부장, 오연상 내과의, 여러 언론인 등의 노력으로 박종철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지자 이번에는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초등학생도 믿지 않을 말을 만들어냈다. 부검을 통해 고문에 의한 사망사실이 밝혀지자 이번에는 두 명의 경관의 ‘업무과욕으로 발생한 우발적 사건’으로 호도하면서 두 명만을 구속하는 것으로 마무리했고, 2·7, 3·3투쟁 등의 규탄투쟁을 보면서는 ‘이 정도면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자신하면서 ‘4·13호헌조치’까지 발표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감옥에 있던 민주인사 이부영을 비롯하여 한재동 교도관, 재야인사 김정남 등의 활약으로 고문에 가담한 경관이 2명이 아니라 5명이라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최소한의 도덕성조차 갖추지 못한 전두환군사정권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마침내 6월 민주항쟁으로 폭발하였다.
 박종철 열사는 6월 민주항쟁 전야에 최루탄에 맞아 사경을 헤매다 사망한 이한열 열사와 더불어 5공화국의 몰락을 이끌어낸 상징적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박종철 열사의 무덤 바로 옆에는 아들을 대신해 지난 30여 년 간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해오다 지난 2018년 사망한 박종철 열사의 부친인 박정기 아버지의 무덤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박종철 열사가 스러져간 옛 남영동대공분실에는 (가칭)민주인권기념관이 들어설 예정이다.


⓽ 김경숙 열사와 유신의 몰락 

 김경숙 열사(1958-1979)의 사망은 박정희 유신독재정권 몰락의 신호탄 역할을 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1976년 가발제조 수출업체인 ㈜YH무역에 입사한 김경숙은 1978년 노조 대의원과 소모임 ‘차돌이’ 대표를 맡는 등 노조활동에 헌신적으로 참여하였다. 1979년에 들어서자 YH는 민주노조를 파괴하기 위한 작전에 본격적으로 돌입하였다. 그해 3월 30일 1차 위장폐업을 단행하지만, 이때는 노동조합의 헌신적 투쟁으로 이를 저지시켰다. 하지만 8월에 단행된 사측의 2차 폐업은 노동조합의 힘만으로는 막아낼 수 없었다. 이에 YH 노조는 각계 민주인사의 도움을 받아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와 면담한 후 신민당에서 농성투쟁을 전개하여 사회적 이슈로 부각시켰다. 하지만 신민당사 농성 3일 째 되던 밤에 경찰의 폭력진압이 시작되었고, 이에 맞서던 김경숙 열사는 투신 사망하였다.
 야당의 당사마저 아무 거리낌 없이 폭력으로 유린하고 한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몰기까지 하는 박정희 유신독재의 폭압성은 적나라하게 폭로되었고, 김영삼 총재의 국회의원직 제명까지 벌어지자 도탄에 빠져 있던 부산과 마산지역의 민중들이 거리로 나서는 부마민중항쟁이 시작되었다. 부마민중항쟁에 대한 대책을 둘러싼 강온건파 간의 갈등은 결국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대통령 박정희가 죽음을 당하는 ‘10·26사건’으로 비화되었고, 마침내 유신은 몰락했다.
 김경숙 열사는 1971년 초등학교 6학년을 미처 마치지 못한 때부터 노동자 생활을 시작했다.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여성노동인력이 부족하던 당시 농촌에서는 아들을 가르치기 위해 딸들은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마치기 무섭게 노동현장으로 취업시키던 시절이었다. 당시 어린 여성들은 야간학교에 다니거나 야학을 통해 공부에 대한 열망을 달래야 했고, 노동자로 버는 돈의 대부분은 집으로 송금하여 오빠와 동생을 위한 학비나 집안의 생활비에 보태야 했다. ‘남아선호’가 뚜렷하던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이 일방적으로 희생을 감내해야 했던 시절의 모습이었다. 김경숙 열사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⓾ 문송면 열사, 산업재해 문제를 사회적 이슈로 만들다  

 문송면 열사는 1988년 7월 2일 수은중독으로 사망할 당시 불과 열다섯 살의 어린 노동자였다. 충남 서산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던 문송면은 야간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기대를 안고 중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인 1987년 12월 5일부터 온도계 제조업체인 협성계공(서울 양평동4가)에 취업해 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배움에 대한 갈증을 풀기도 전, 신나 세척과 온도계의 수은을 주입하는 일을 한 지 한 달 만에 몸이 아프고 머리가 쑤시기 시작했다. 문송면은 두 달 만에 회사를 휴직할 수밖에 없었고, 여러 병원을 찾았지만 병명조차 알 수 없었다. 의과대학에서 산업보건에 대한 교육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던 시절의 아픈 현실이었다. 어렵게 서울대병원에서 수은 중독과 신나 중독이라는 진단을 받은 문송면은 비로소 산재요양 승인을 신청하지만, 회사와 서울남부지방노동사무소는 서울대병원이 산재지정병원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이마저도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가 회사와 노동부로부터 산재요양승인을 받은 것은 <동아일보> 등 언론에 사건이 폭로된 이후인 6월 20일이었다.
 당시 <한겨레신문>은 '무관심의 그늘 직업병'이라는 기사에서 "산업보건 전문가들은 직업병을 찾아낸 문군의 경우는 '정말 운이 좋은 예'라고 지적한다."면서 "많은 노동자들이 공장의 열악한 노동조건 때문에 여러 가지 직업병에 시달리고 있지만 노동자 스스로가 잘 모르는 탓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으며, 직업병이 확실한데도 의사들이 제대로 진단을 해주지 못해 보상조차 못 받고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그렇게 '정말 운이 좋은 예'였던 문송면도 수은 중독 진단을 받은 지 4개월 만인 7월 2일 여의도성모병원에서 사망하고 만다. 문송면의 시신은 노동계가 문송면 산업재해노동자 장례위원회를 꾸려 투쟁을 벌인 끝에 회사 측의 공개사과와 보상금 합의를 이뤄낸 다음 마석 모란공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문송면의 죽음을 계기로 산제문제는 사회적 이슈가 되었고,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이황화탄소 중독사건까지 연이어 터지면서 시민사회와 노동계의 노력으로 1990년 마침내 <산업안전보건법> 전부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⑪ 문익환 목사·박용길 장로, 한국근현대사의 산증인 

 문익환 목사(1918-1994)는 암울했던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정권 내내 줄곧 재야 민주화 운동을 이끌어 온 정신적 지주였다. 1980년대에는 계훈제 선생(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안장), 백기완 선생과 더불어 ‘문계백’으로 불리던 재야운동의 지도자였다. 
 성직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종교적 분위기에서 성장했고 사회진출 후에도 평범한 목회자로서 신학대 강단에 섰던 문익환 목사가 유신정권의 압제에 맞서 분연히 민족민주운동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은 1974년 10월 재야단체인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가하면서 부터였다. 어렸을 적부터 친구인 장준하의 죽음(1975)도 문익환이 민주화운동에 앞장서도록 강제하는 역할을 했다. 1989년에는 막혀있는 통일문제를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직접 논의하기 위해 방북했다가 노태우정권 하에서 수난을 당하기도 하는데, 이후 문익환 목사는 통일운동에 남다른 집념을 보이게 된다.
 문익환 목사의 부인이기도 한 박용길 장로(1919-2011) 역시 남편과 함께 재야 민주화운동에 헌신해온 분이다. 1985년에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결성을 주도하기도 했다. 1995년에는 한반도의 핵위기, 전쟁위기로 한반도가 위기에 몰렸을 때 김일성 주석 사망 1주기를 계기로 북쪽 동포를 위로하고 남과 북에 평화와 통일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문익환 목사에 이어 다시 한 번 방북의 길을 선택하였다. 이후 통일맞이, 민화협, 통일연대,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에서 활동하며 남북 민간교류를 활성화하는 등 한평생을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에 헌신하였다.
 문익환 목사의 집안은 우리 겨레가 경험한 한국근현대사의 영욕을 응축하여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문익환 목사의 아버지 문재린(1896-1985)도 기독교 목사였는데, 함북 온성에서 태어나 북간도 명동으로 아버지를 따라 이주한 후 3·1운동과 국민회 조직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문익환 목사의 어머니 김신묵 여사의 언니는 철혈광복단이 독립군자금 마련을 위해 일으킨 1920년의 유명한 ‘15만원 탈취사건’의 주인공 최계립(최봉설)의 부인 김신희 여사이다. 연해주에 거주하던 김신희 여사는 1937년 스탈린에 의해 남편 최계립과 함께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당하였고, 무덤은 카자흐스탄 침켄트시에 있다. 시인 윤동주와 독립운동가 장준하는 문익환 목사의 평양 숭실중 동창이다.


⑫ 비정규직 노동자와 헌신적으로 연대한 김태환 열사와 김태환 노동상 

 김태환 열사(1966-2005)는 1991년 수안보파크호텔에 입사하여 수안보파크호텔노조 설립에 앞장서며 노조위원장이 되었다. 1992년부터는 한국노총 충북지역본부 충주지역 지부장을 맡아 지역연대투쟁에도 앞장섰다. 열사는 마지막 글로 “세상의 정의가 서지 않는다면, 차라리 이곳에서 모든 것을 묻으리라”는 말을 남길 만큼 평소 “노동자들을 위해 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2005년 충주지역레미콘 노동자들이 노동3권 보장과 운송단가 인상 투쟁을 벌였는데, 교섭은 파행을 거듭하면서 돌파구가 열리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사측이 대체차량까지 투입하며 압박을 가하였다. 이에 열사는 충주레미콘노조를 비롯한 충주지역 노동자와 함께 사측의 행태에 항의하면서 “레미콘노동자 노동자성 인정과 운송단가 인상, 단체협약 체결을 위한 결의대회”를 개최하였고, 결의대회를 마친 후에는 충주사조레미콘 회사 앞으로 이동해 대체차량을 온몸으로 막았다. 그러나 사측과 경찰 공권력은 차량을 가로막던 열사에게 차량을 앞세워 돌진하였고, 열사는 차량에 치여 사망하였다.
 열사의 죽음은 800만 비정규직 노동자와 특수고용직 노동자의 노동현실을 전 사회에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한편, 열사의 연대투쟁은 정규직 노동자가 비정규직 노동자와 연대하는 모습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고 평가되었다. 같은 해 11월 전태일 노동자상을 수상하였고, 2014년에는 김태환 노동상이 제정되었다.
 2019년 제6회 김태환 노동상은 금속노련 남양넥스모 노동조합(위원장 조제현)이 받았다. 남양넥스모 노동조합은 단체협약에 비정규직 채용관련 조항을 개정하여 지난해 임단협 타결일 기준으로 32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시키고 해고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복직시킨 공로 등을 인정받았다.


⑬ 최종범 열사와 삼성의 무노조경영 

 민주노총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천안분회 조합원이었던 최종범 열사(1981-2013)는 2013년 10월 열악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과 노조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삼성그룹 노조탄압의 실체를 폭로하면서 자살하였다. 열사는 자살하기 전날(10월 30일) 회사동료들 간에 소통하는 카카오톡방에 "지금 이 문자 캡쳐해주세요. 저 최종범이 그동안 삼성서비스 다니며 너무 힘들었어요. 배고파서 못살았고 다들 너무 힘들어서 옆에서 보는 것도 힘들었어요. 그래서 전태일님처럼 그러진 못해도 전 선택했어요. 부디 도움이 되길 바라겠습니다."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
 민주노총과 시민사회단체는 열사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삼성 사용자에게 “노조탄압을 중단할 것, 유가족에게 사과하고 교섭할 것” 등을 요구하며 투쟁을 전개하였다. 19일 동안 삼성 본관 앞 노숙농성투쟁을 비롯한 51일 간의 치열한 투쟁 끝에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는 12월20일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삼성전자서비스가 교섭위임)와 교섭을 타결하고 열사의 장례식을 치렀다.
 최종범 열사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2014년에도 삼성전자서비스지회 노동자의 죽음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양산센터 분회 분회장 염호석 열사(1979-2014)였다. 삼성의 살인적 노조탄압 속에 해운대·아산·이천센터의 위장폐업이 이뤄졌고, 조합원에 대한 표적탄압과 생계압박 등이 전국적으로 이어졌다. 당시 투쟁의 선봉에 섰던 염호석 열사의 3월 급여는 70여만 원, 4월 급여는 41만 원 수준으로 전 조합원이 생활고로 신음하던 시기였다. 이에 염호석 열사는 삼성의 노조탄압에 맞선 5월 파업에 돌입한 후 정동진에서 유서를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저는 지금 정동진에 있습니다. 해가 뜨는 곳이기도 하죠.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우리 지회가 빛을 잃지 않고 내일도 뜨는 해처럼 이 싸움 꼭 승리하리라 생각해서입니다. 더 이상 누구의 희생도 아픔도 보질 못하겠으며 조합원들의 힘든 모습도 보지 못하겠기에 절 바칩니다. 저 하나로 인해 지회의 승리를 기원합니다. 저희가 승리하는 그 날 화장해 이곳에 뿌려주세요. 승리의 그날까지 투쟁!"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전 조합원은 삼성과 경찰의 ‘시신탈취’에도 불구하고 염호석 열사정신계승 투쟁을 벌이며 41일간 서초동 삼성사옥 앞에서 노숙농성을 이어갔고, 마침내 삼성의 무노조 경영 신화를 깨고 임단협을 체결하였다. 열사가 목숨을 끊은 지 45일 만인 6월 30일 서초동에서 영결식을 가졌고, 열사는 7월 1일에 솥발산 열사묘역에 안장되었다.
 열사가 돌아가신지 4년 후인 지난 2018년에는 열사의 아버지 염모 씨가 '노조장'으로 장례를 치러달라는 아들의 뜻과 달리 삼성 측으로부터 6억원 가량의 돈과 함께 "아들의 장례를 가족장으로 치러달라"는 청탁을 받고 경찰과 함께 ‘시신탈취’를 벌였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염모 씨는 마치 삼성의 직원처럼 일했던 경찰의 도움으로 열사의 시신을 인계받아 부산으로 옮겼고 경남 밀양에서 화장장을 치렀다. 노조를 절대 인정하지 않으려는 삼성의 행태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3. 탐방을 마치며
 - 살아있는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되어 있는 열사들을 보면 한국 사회의 시대별 변화상을 읽을 수 있다.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열사들 중 1980년대와 1990년대 초까지는 학생열사들이 많았다. 반면, IMF사태 이후에는 학생열사는 보이지 않고 노동열사들이 많아졌다. 최근에는 정규직에 종사하는 노동열사는 잘 보이지 않고 비정규직 노동열사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시대의 변화에 따라 누가 더 절박한 위치에 놓이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다.
 모쪼록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탐방이 한국 현대사 속에서 자주·민주·통일의 세상, 노동해방의 세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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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모연대 19-11-14 15:30

    주석----

    1) 국립묘지의 역사는 1900년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황제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는 방편의 하나로 지금의 장충단공원 자리에 갑오의병(1894)과 을미의병(1895) 등을 ‘충의열사’로 기리는 ‘장충단’을 쌓는다. 대한민국이 정식으로 수립된 다음해인 1949년에는 바로 그 자리에 “위국진충의 영령과 신생 대한민국의 수호신들의 영령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제단’을 설치하고 ..... 순국장병의 영령을 봉안케”되는 ‘장충사’를 설치한다.(한성일보, 1949. 9. 23) 이곳에는 6.25한국전쟁 직전까지 38선 일대와 지리산 등에서 숨진 군인과 경찰 7천여기가 모셔졌다고 한다.     
    2) 권재혁 선생은 재심을 통해 2014년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되었다. 탤런트 권재희가 권재혁 선생의 딸이다.
    3) 아래 열사에 대한 소개는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의 홈페이지(yolsa.org <열사의 삶>)를 참고하였다.
    4) 최백근 선생은 1961년 망우리공원묘지에 안장되었는데, 2018년 마석모란공원으로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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