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
추모연대
로그인
홈으로 | 사이트맵
참여마당
참여마당
공지사항
추모연대소식
성명 보도자료
location_dot.gifHome > 참여마당 > 성명 보도자료
성명 보도자료

[집회자료] 5차 의문사 진상규명 촉구 집회(2022.10.18)

작성자 추모연대 등록일 2024-04-19 조회수 4회 댓글수 0건
파일 #1 파일1 다운로드   사이즈 431.0K 다운수 0회

촉구 서한

 

진화위는 박창수·정경식 의문사 사건 진상규명 조사에 최선을 다하라!!

 

박창수 의문사 사건은 1991년 대우조선 노동조합 백순환 집행부가 회사 측과의 단체교섭이 결렬되자 조선소 내에 있는 골리앗 크레인을 점거하고 파업투쟁에 돌입했다. 대우조선 노동조합 이 파업에 들어가자 노태우정권과 김우중 대우자본은 곧바로 공권력을 투입해 파업 노동자들을 진압하겠다는 발표를 한다. 이 소식을 접한 대기업 연대회의 소속 사업장 대표자들은 긴급하게 간부들을 소집해 경기도 의정부 다락원에서 수련회를 가졌다. 1991210일 대기업 연대회의 소속 간부들이 수련회 장소로 모였고, 수련회에서는 대우조선 파업을 지지하는 성명서와 파업기금을 모으자는 결의를 하였다.

 

수련회를 마치고 집으로 귀가 하던 중 길목을 지키고 있던 경찰들은 참석했던 간부 69명 전원을 강제연행 해 갔다. 경찰은 간부들을 연행 한 후 위원장 급 8명은 대공분실로 끌고 가서 강압적 조사를 하고 3자 개입금지혐의로 구속시켰다, 그리고 나머지 간부들은 여러 경찰서로 나누어 75시간이 넘게 조사를 한 후 훈방 조치하였다. 이때 당시 한진중공업 위원장이었던 박창수열사도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박창수 열사는 199154일 구치소 운동장에서 의문의 부상을 입고 안양병원으로 후송되어 이마 34바늘을 꿰매고 중환자실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다. 박창수 열사는 재소자 신분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중환자실 출입문 앞은 구치소 교도관들에 의해 철저히 지켜지고 있었다. 수감상태와 다를 바 없는 상황에서 56일 새벽 430분경 박창수 열사는 안양병원 1층 어린이놀이터 시멘트 바닥에서 의문의 죽음으로 발견되었다.

 

정경식 의문사 사건은 정경식 열사가 19845월 경 대우중공업 창원공장에 입사한 후 19865월 경, 노조민주화 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같은 공장 대의원들과 함께 당시 대의원 선거와 지부장 선거를 준비하며 민주노조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중에 발생하였다. 정경식 열사는 지부장 선거 과정에서 폭행사건에 휘말리게 되었고 폭행사건의 피해자 인 이동석과 합의를 모색하였다. 198668일 오전 9시경 정경식 열사는 이동석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외출을 나간 후 실종되어 9개월이 지난 198832일 경남 창원의 불모산에서 유골상태로 발견되었다.

 

이 두 사건 조사가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사건조사 방향과 조사기조가 세워져야 한다. 1987년 전두환 정권은 서울대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폭발한 국민들의 분노에 직면하여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반대 하는 재야인사들에 대한 탄압으로 결국에는 ‘6. 10민주항쟁이라는 전 국민적 저항에 부딪쳤다. 이는 다시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열악한 근로조건에서 가장 탄압을 받아오던 노동자들의 대정부 투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따라 노동운동에 대한 변화와 정권과 자본의 대응 전략도 급격하게 변화를 하게 된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전의 공안탄압의 중심은 학생운동이었다. 하지만 877,8,9월의 대투쟁을 겪으면서 정권과 자본은 민주노조 운동으로 공안탄압 방향을 바꾼다. 그 중심에 바로 전국 노동조합 협의회과 대기업 연대회의가 있었다. 전노협은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만들어 낸 노동자들의 자주적 조직으로 학생운동 출신 활동가들이 현장으로 대거 유입되면서 노동자 정치의식을 갖춘 노동조합 조직들이 중소사업장 중심으로 건설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한 정부의 노동정책은 관계기관대책회의에서 논의되고 결정되는 구조를 갖고, 여기에서 결정되는 것들은 초법적이고 억압적이었다. 그리고 국가정보원 안기부와 보안사는 용공분자 색출과 방위산업체 보안지원 활동을 이유로 상시적으로 사업장을 출입하며, 노동조합 활동에까지 개입해 들어오게 된다.

 

진상규명 위원회 1기 조사에 따르면 박창수 의문사 사건에서는 사노맹을 색출한다는 이유로 홍상태 국가기관 안기부 요원이 한진중공업 사업장에 들어와 당시 박창수 위원장 집행간부들에게 접근을 하였고, 노골적으로 전노협과, 대기업 연대회의에서 탈퇴할 것을 강요한다. 박창수 위원장이 대기업 연대회의 사건으로 구속이 되자 박창수 위원장을 조기 석방시킬 수 있는 것은 전노협과 대기업 연대회의를 탈퇴라고 간부들을 회유하며 구속되어 있는 박창수 위원장을 설득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임금인상에 대한 안을 제시하면서 민주노조 와해 공작을 지속적으로 실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정경식 의문사 사건의 경우 진상규명위원회 1기 조사에서는 보안사와 경찰이 노조지부장 선거과정에 발생한 폭행사건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정경식 열사가 민주노조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경찰은 정경식 실종사건을 충분히 인지했음에도 초등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또한, 당시 정경식 열사가 이동석의 전화를 받고 나간 후 실종이 되었다면 그가 만났던 관련자들의 행적에 대해서도 수사를 했어야 하나 이것조차도 수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경찰 개입 정황 증거들이 있음에도 아직도 정경식 의문사 사건은 진상규명이 되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총 전국금속노동조합은 두 의문사 사건이 30년 전에 발생하였기에 가해자에 대한 직접 조사와 진실규명을 위한 고백에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박창수 의문사 사건에서 대기업연대회의간부들을 연행한 것 자체가 불법이었음이 재판에서 확인되고 있다. 또한, 구속의 사유가 된 3자 개입금지는 이미 노동조합 활동을 침해하는 행위라 하여 관련 법이 폐지된 바 있다. 전노협과, 대기업연대회의 탈퇴를 종용한 사실이 명백하게 들어나 있고, 박창수 열사가 서울구치소에서 어떻게 부상을 입었는지에 대한 사실도 구치소에서 불려 주는 대로 적었다는 당시 구치소 재소자들의 진술 또한 밝혀진 상태이다. 박창수 의문사 사건은 당시 정권과 자본의 노동운동 탄압정책을 펼치는 과정에서 발생하였다. 국가의 공권력이 자행한 박창수 의문사 사건에 대해 진화위는 철저하게 진실을 규명하기 바란다.

 

정경식 의문사 사건은 정경식 열사가 실종되고 나서 보안사와 경찰이 충분히 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음에도 민주노조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이 사건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지금이라도 실종 당시 정경식 열사가 만난 것으로 추정되는 관련자 조사를 철저히 한다면 사건의 진상은 밝혀 질 수 있을 것이다. 진화위는 정경식 의문사 사건 진상규명을 위해 당시 보안사, 경찰, 대우중공업 직원 등 관련자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라.

 

민주노총 금속노동조합은 진화위의 수사권을 가지지 못한 권한으로 인해 조사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또한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조사관들의 철저한 조사활동을 통해 사건에 접근한다면 진상규명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국가기관의 비협조와 은폐 행위가 있으면 이를 국민들에게 정확하게 알려야 할 의무 또한 진화위는 가지고 있다.

 

향후 금속노조는 박창수정경식 조합원의 의문사 사건 조사과정을 철저히 주시할 것이다. 진상규명 조사에 필요한 사항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협조할 것이다. 금속노조는 두 의문사 사건의 진상규명이 명백히 밝혀 질 때까지 전 조합원들의 단결된 힘으로 투쟁해 나갈 것임을 밝히면서 이 촉구서한을 위원회에 전달하고자 한다.

 

20221018

 민주노총 전국금속노동조합





이전글 [집회자료] 6차 의문사진상규명 촉구 집회(2022.11.25)
다음글 [결의문] 4차 의문사 진상규명 촉구 집회(2022.09.20)

목록보기

추모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