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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뉴스]‘악의 평범성’에 저항한 친구 정성희의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해 싸우다

작성자 추모연대 등록일 2022-09-07 조회수 136회 댓글수 0건

‘악의 평범성’에 저항한 친구 정성희의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해 싸우다

[연재] 수수의 ‘서사를 담은 삶들’ 세 번째 이성우

  • 기자명 이형숙  
  •  입력 2022.08.16 02:25



‘서사를 담은 삶들’은 현재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삶을 듣고자 기획되었습니다. 혹자는 박정희식 산업화의 신화가 깨진 것처럼 과거 민주화 ‘운동’의 신화도 깨졌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운동’적 삶을 살아가는 많은 활동가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삶에는 역사적 서사가 담겨 있습니다. 친구가 때로는 열사가 되고 일상적인 활동이 역사에 큰 사건으로 남기도 합니다. 역사적 사실인 ‘서사’를 안고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삶의 순간들을 담고자 합니다. 수수의 ‘서사를 담은 삶들’ 연재는 격주 화요일에 게재됩니다. 수수는 이형숙의 활동명입니다. / 필자 주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인 존재라 하더라도 천성에는 분명히 이와 상반되는 몇 가지가 존재하는데 천성적으로 인간은 타인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단지 그것을 바라보는 즐거움밖에는 아무것도 얻는 게 없더라도 타인의 행복이 필요하다.”

이 글은 자유 시장주의의 원리를 제공한 아담 스미스의 책 ‘도덕감정론’의 첫 부분이다. 아담 스미스는 ‘연민과 동정’을 가리켜 타인의 슬픔에 대한 ‘우리의 동류의식’이라 표현했다. 그조차도 인간이란 존재가 타인의 행복에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을 공통적으로 지니고 태어났다고 본 것이다.

인간의 공감력은 일상생활에서는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내가 당한 고통을 알고 지낸 주변의 누군가는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도 나타난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은 육체에 가해지는 극단의 고문을 당하면서도 뜻을 함께 한 ‘동지’를 지키기 위해 고통은 감내했다. 자신이 안고 가겠다는 심정으로 죽음을 선택하거나 타협하지 않는 과정에서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최근 목도하게 되었다. 한때 강제 징집의 희생자에서 보안사, 경찰 등 폭력 기관의 밀정이 되었고, 이를 토대로 경찰이 되어 승진을 통해 승승장구 한 김순호 경찰국장의 경우가 그러하다.

자신의 밀고가 한때 함께 했던 사람들을 사지와 고통 속에 놓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아무리 이념이 맞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떻게 수년을 알고 지낸 사람들을 이런 극단적 상황에 몰아넣을 수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독일 나치의 아이히만은 500만 명의 유태인들을 강제수용소로 보내는 열차수송의 최종책임자로서 행정 서류를 통해 유대인 학살에 가담했다. 아이히만의 반인륜 범죄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지만, 그의 극악한 행위를 두고 한나 아렌트는 사고의 무능과 익명성 때문에 이런 ‘악의 평범성’이 나타났다고 지적한다.

동지를 밀고하고 이를 이용하여 관직을 탐했던 그의 행위는 인간 실존의 기본이 되는 도덕 감정의 부재라 할 수 있다. 경찰국장 김순호의 행위를 만든 것은 국가이다. 강제 징집을 한 주체도 국가였고, 징집이후 학생운동 상황을 조사하고, 이를 활용하여 학생, 종교 등 각 분야에 프락치 활동을 강요한 주체도 국가였다. 이런 도덕 불감의 괴물을 만들었던 국가 기구는 경찰, 보안사, 군부, 안기부 등이다.

이와 다른 삶을 살았던 사람들도 있다. 군에 강제 징집되었지만, 학생운동을 하는 동료를 지키고, 보안사의 프락치 강요를 거부하는 과정에서 1982년 의문사 당한 정성희씨가 다른 삶을 선택한 사람이다.

강제 징집되어 의문사 한 정성희의 서사들

정성희씨는 1981년 연세대 영독불 계열에 입학하였다. 대학 입학 후에는 흥사단아카데미라는 써클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981년은 전두환의 5공화국이 출범한 해였다. 광주시민을 무참히 짓밟고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정권에 대해 당시 대학생들은 타도를 주장하였고, 자연스럽게 이런 정치 민주주의와 함께 사회 전반의 민주화에 대한 고민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다른 신입생들과도 활동을 통해 나누었다. 이 과정에서 대학 내 학생들에게 유인물을 제작하여 배포했다.

그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군사훈련을 시켰던 정권의 학원 병영화에 맞서기도 했다. 병영전략의 하나였던 문무대 훈련에 참가해서는 군사훈련의 문제를 들어내고자 시위선동과 민중가요 선창을 하여 문제 학생으로 찍혀 리스트에 오르게 되었다. 그로 인해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정성희씨는 1981년 11월 25일 교내시위로 인해 시위 참여 학생들과 함께 경찰에 연행되었다. 경찰 조사를 받은 후 그는 연행된 동료 14명과 함께 11월 28일 강제로 징집되었다. 그리고 1982년 1월 14일 자대배치를 받았다.

자대배치 과정에서 그는 이미 관리 대상이 되어 있었다. 전입 시에 입대와 관련된 배경이 통보되었고, 부대 지휘계통의 수직적인 관찰과 보안부대의 지휘관, 분대장, 동료들에 의한 감시 체계가 구축되었다. 정성희씨는 부대에서 생활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했다. 또한, 지휘계통과 보안부대의 관찰, 면담이 수시로 있었다.

보안사에 의해 감시당하는 상황에서 정성희씨를 둘러싼 사건들이 계속 발생하였다. 우선, 정성희씨와 함께 강제 징집되었던 입대동기가 불온서신을 보냈다는 이유로 보안사령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학교 선배가 ‘부미방(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의 주범으로 오인되어 보안사령부에서 조사받는 과정에서 정성희씨와 학교동료들을 언급한 사실이 있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등의 조사를 토대로 판단해 볼 때 정성희씨는 부미방 사건과 관련하여 보안부대의 집요한 조사와 프락치 강요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도시산업선교회에서 활동했던 조화순 목사가 이모였기 때문에 종교계에 대한 프락치 공작 또한, 정성희씨의 죽음과 관련하여 의심되고 있다.

프락치 강요와 민주화운동 침투 공작에 정성희씨를 활용하려 했던 증거들이 있다. 학교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에도 부대에 복귀하면 조사를 받을 것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학교 상황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하지 말아 달라는 정성희씨의 당부를 다수의 친구들이 들었다는 것이다.

부대에 복귀한 정성희씨는 사망하기 직전 전방실습생에게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에 대해 물었다. 그리고 1982년 7월 23일 의문의 죽음을 맞았고, 강제징집, 녹화사업으로 인한 첫 번째 희생자가 됐다. 군은 유가족에게 현장답사를 불허하고, 부검포기서와 화장동의서, 사인에 대해 법적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받아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에서도 진상을 규명하지 못한 채, 국방부는 2018년 순직 결정하였다.

하지만 가족들과 추모사업회는 정성희씨의 죽음에 대한 실체를 밝히기 위해 2020년 발족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정을 통해 진실규명을 요구하고 있다.

친구 정성희의 의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있는 이성우의 삶

1981년 연세대 경제학과에 입학한 이성우씨는 흥사단아카데미 써클에서 정성희씨를 처음 만났다. 입학 전 고등학생 시절부터 정치,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던 이성우씨는 학생운동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에게 맞는 써클을 찾아 여러 곳을 전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당시 학생운동 분위기에서는 이상하게 비춰지기도 했다. 그러던 중에 자신을 받아준 곳이 흥사단아카데미였다.

1학년생이지만 의미 있는 일을 해보자는 의기투합을 했던 정성희씨와 이성우씨는 학교에 유인물을 만들어 뿌리기로 했다. 막상 유인물은 만들기로는 하였으나 어떻게 하는지는 몰랐다. 이성우씨는 대학에 들어오기 전 교회에서 주보를 만들어 본 경험이 있었다. 등사기를 다룰 줄 알았다. 이에 비해 정성희씨는 마음은 뜨거웠으나 실무를 해본 경험은 없었다.

‘5천 신입학우에게 고함’ 유인물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유인물을 돌리기로 한 날 이성우씨는 늦잠을 자는 바람에 학교에 늦게 도착하였다. 학교에 도착하고 보니 정성희씨 등이 이미 돌린 후였다. 이렇게 두 사람은 자신들이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통해 손, 발을 맞춰갔다.

삼수를 해서 연세대에 입학했던 이성우씨는 더 이상 병역을 미룰 수 없었다. 마침 방위로 입대를 할 수 있던 터여서 1981년 2학기를 휴학하고 군대에 갔다. 방위 복무 중에 그는 허리를 다쳐 3개월 군 복무를 하고 1982년 3월 경 의가사 제대를 했다.

그는 군 복무를 마치고 바로 학교로 돌아왔다. 정성희씨는 강제 징집되어 군복무 중이었고, 다른 많은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성우씨는 1982년도 2학기에 1학년으로 복학하였다.

이성우씨는 학교에 머무르며 학생운동에 전념했다. 정성희씨의 휴가 중에 학교에서 만났다. 전방GP에 근무하면서의 생활은 어렵지만 자신이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겠다는 친구 정성희씨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학교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지 말라는 말을 했다. 친구 정성희씨의 말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써클실에서 만났던 친구는 군대에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는 소식으로 전해 졌다. 처음 사망소식을 접했을 때는 경황이 없었다. 너무 충격적이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지도 몰랐다.

1981년부터 진행된 강제 징집, 녹화사업의 규모와 실체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지금에서 생각하면 너무 허망하게 처음에 대처를 했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당시에는 자살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도 없었지만, 국가가 군대를 통해 학생운동 전력자들을 강제로 징집하여 조사하고, 프락치로 활용하려는 공작을 하는 그런 일들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 과정에서 친구 정성희씨가 죽었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강제징집 녹화사업에 의한 첫 번째 의문사로 그렇게 친구를 보내게 되었다.

‘제40주기 정성희 추도식’에서 추도사를 하고 있는 ‘정성희추모사업회’ 대표 이성우씨 [사진제공-이성우]
‘제40주기 정성희 추도식’에서 추도사를 하고 있는 ‘정성희추모사업회’ 대표 이성우씨 [사진제공-이성우]


이성우씨는 복학하고 학생운동에 전념하던 중 1983년 학사 제적을 당했다. 학교를 졸업해야 한다는 미련은 없었다. 그래서 인천 부평지역 노동현장으로 들어갔다. 처음엔 안양 등지의 마찌꼬바 규모의 작은 공장에 다녔다.

하지만, 용접 등 전문 기술을 배워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을 하고자 마음먹고는 직업훈련원에 들어가 기술을 배웠다. 그리고 취직한 곳이 동성상공이다. 공장생활은 체력적으로 힘들었다. 일도 몸에 익지 않은 상태에서 같이 일하는 공장의 동료들과 관계도 맺고, 함께 노동현장에 들어간 동지들과도 모임을 가졌다.

그가 입사 8개월 되던 때 동성상공 노동자들이 파업을 했다. 파업을 시작하자 동성상공이 아닌 지역에서 노동자들을 지원하는 사람들이 도와주었다. 이들의 도움으로 유인물도 만들고 노래 등 파업 프로그램 운영하는 것도 도움 받았다. 하지만 파업은 얼마가지 않아 끝났고 이성우씨는 해고되었다.

해고된 후 그는 노동 현장 경험을 살려 ‘공실위(인천지역민주노조건설 공동실천위원회)’에서 상근활동을 시작했다. 공실위 활동은 노동자 상담, 홍보, 조직 등의 활동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공실위 활동 중에는 파업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현장 지원이 있었다. 이것이 자본가들이 말하는 제3자 개입이다.

노동운동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과 논의 하는 과정에서 이제 노동자들도 공개적으로 노동 상담도 받고, 직접 노동자들이 활동 역량도 높이는 등 노동자들의 모임을 대중적으로 알려진 가운데 활동을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목적을 두고 ‘인노회(인천부천민주노동자회)’를 결성하기로 하고 준비해 들어갔다.

이성우씨는 인노회 준비 과정에 사무국에 파견되어 상근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때가 1988년이다. 인노회는 대중조직으로 활동할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전화번호나 사무실을 공개하기로 하고 이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론에 알려진 것처럼 1989년 2월 인노회 사무실에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다. 연행 후에도 첫 번째 청구된 구속영장은 기각되었다. 인노회는 사무실이 공개되어 있는 등 대중적인 노동단체기 때문에 이적 단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틀 후인 1989년 2월 16일 검찰은 구속영장을 재청구하였고 이성우씨를 비롯한 5명에 대해 구속이 결정되었다. 당시 구속을 피하기 위해 이성우씨는 수배자가 되었다.

구속이 결정된 이틀 후 그는 결혼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수배상태였기 때문에 이성우씨는 결혼식장에 갈 수 없었다. 신랑 없는 결혼식이 신부의 눈물 속에 진행되었다. 이후 2년 간 수배자가 되어 도망 다녀야 했다. 자신도 없이 결혼식을 마쳤던 신부와는 부평을 벗어난 지역에서 함께 생활하였다. 수배 중에 첫째 아이가 태어났다.

수배생활을 하고 있던 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이성우씨는 외아들로서 어머니의 빈소를 지키기 위해 장례식에 참석했다. 장례 후에 바로 구속되었다. 출소 후에 이성우씨는 다시 학교에 복학하여 졸업을 했다.

졸업을 하고 나서는 생활을 위해 학원에 취업을 했다. 이 학원은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함께 했던 친구들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나중에는 그가 직접 학원을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생활인으로 살아가면서도 친구 정성희씨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을 놓치지는 않았다. 그래서 4년 전부터는 본격적으로 전념하여 활동하고 있다.

그는 친구 정성희씨의 여동생들에게 가장 큰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자신은 노동운동과 생활인으로 살아가느라 많이 챙기지 못한 오빠의 죽음을 여동생들이 사회적 이슈로 만들고 진상규명을 위해 지금까지 노력해 왔기 때문이다. 1주기가 되던 때에는 인천에서 추도식을 했던 것도 가족들이었다.

정성희씨의 의문사 진상규명 활동에는 연세대 민주동문회 등 연세대 친구들과 선, 후배들이 함께 하고 있다. 특히 강제징집을 당한 피해자들이 이제 본격적인 진상규명 활동을 하고 있는데, 이 과정까지 정성희씨의 진상규명 요구가 보안사의 강제징집과 녹화 선도 공작의 실체 규명 요구 활동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성우씨는 인노회 활동과정에서 김순호를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8월 12일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열린 김순호 사퇴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에 참석한 이성우씨. [사진제공-이성우]
8월 12일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열린 김순호 사퇴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에 참석한 이성우씨. [사진제공-이성우]


1988년경쯤이었는데 만났을 때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물었다. “그때는 서로에 대해 묻고 그러거나 하는 것이 없었어요, 감시 받고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서로의 정보를 많은 가지고 있는 것도 부담이라.”

얼마 전인 8월 12일 이성우씨는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김순호 사퇴를 촉구하는 기자회견 겸 집회에 참석했다.

국가는 왜 괴물을 만들고, 친구 정성희를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 왜 이 사실을 40년 동안 감추고 진실을 밝히지 않는지, 정성희씨를 비롯한 3천여 명을 강제징집, 녹화공작 한 50여 명 보안사 요원 수사관들은 왜 아직도 침묵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 사실을 밝혀야 할 국가의 책무를 위임받은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상규명 조사는 왜 지지부진한 지.

그래서 이성우씨는 의문사 추모사업회들과 8월 23일 친구 정성희씨의 진실규명을 촉구하는 집회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앞에서 가질 예정이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원문 : ‘악의 평범성’에 저항한 친구 정성희의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해 싸우다 < 연재 < 특집연재 < 기사본문 - 통일뉴스 (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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