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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뉴스] 가족으로서의 책무, 의문사 진상규명과 최종순씨의 삶

작성자 추모연대 등록일 2023-02-28 조회수 67회 댓글수 0건
링크 #1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7165 클릭수 14회

가족으로서의 책무, 의문사 진상규명과 최종순씨의 삶

[연재] 수수의 서사를 담은 삶 (12)

  • 기자명 이형숙 
  입력 2023.01.31 00:23  댓글 0


특별한 경우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간다. 가족은 매우 사적이고 고유한 영역이다. 이처럼 고유한 가족 공동체에서 공동체의 의미는 ‘코무니타스’라는 라틴어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코무니타스에서 콤Com은 ‘공통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무누스Munus는 ‘책무, 업무, 선사’의 의미인데 두 라틴어가 합쳐져 공동체 코무니타스가 되었다. 그래서 가족 공동체는 가족이라는 사적이고 고유한 영역의 공통된 책무를 이르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가족의 공통된 책무에서 보통의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맡은 부모, 자식 등의 역할을 해나가면 될 일이다. 하지만, 현대사에서 국가폭력 등의 ‘피해자’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일반적인 가족으로서의 역할과 다른 책무를 갖게 된다. 의문사의 경우 수십 년이 경과되도록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보니 부모의 책무를 형제가 또는 자녀가 이어가는 경우도 생기도 있다.

군대에서 의문사 한 최우혁씨의 진상규명을 위해 싸워온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끝나지 않은 진상규명 책무를 이어가고 있는 최종순씨의 삶이 그러한 경우이다.

군대에서 의문사 한 최우혁씨의 서사

최우혁씨는 1984년 서울대 서양사학과에 입학하였다. 그가 입학한 당시는 전두환 군부정권 시절이었고, 그는 당연하게도 입학과 함께 사회과학 관련 세미나를 하며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그가 활동했던 ‘경제법연구회’는 학생운동뿐 아니라 노동운동 등 사회운동에도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써클이었다.

그는 1학년 시절부터 파쇼악법 개정 국민대회, 청계피복노조합법화 투쟁, 레이건 방한 반대 시위 등에 적극 참여했다. 2학년이 되던 1985년에는 총선반대 집회, 5.1절 노동절 기념집회. 5.18집회에 참여했다. 1986년에 인천에서 있었던 5.3투쟁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그는 경찰에 연행되어 구류를 살기까지 했다.

가족들은 최우혁씨가 학생운동에 과정에서 구류를 살고 부상을 입기도 하자 그를 염려하기 시작했다. 그가 학생운동을 중단하는 방법은 학교를 휴학하고 군대에 가는 것이라 생각한 가족들은 그의 등록금을 지원하지 않았다.

최우혁씨는 1987년 4월 28일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15일 20사단에 배치되었다. 최우혁씨는 처음 경비소대에 배치되었으나 나중에 정보과 서기병으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학생운동을 했던 그의 전력이 보안부대에 의해 근무 부대에 통보되면서 그는 관심 대상 병사로 분류되어 관리되기 시작했다.

1990년 보안사령부에 근무하던 윤석양 이병이 양심선언 과정에서 파악된 보안사령부(서빙고 분실)의 민간인 사찰자료 중에는 서울대 운동권 동향파악 대상자(387명)에 대한 사찰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이 자료에서 최우혁씨의 기록을 살펴보면 “최우혁(서양사3) 국가보안법 위반 이○영 외 3명, 5.3인천시민회관 앞 광장 시위 참가”라고 적혀 있다.

입대한 지 4개월이 지난 1987년 9월 8일 오전 0시 40분경 최우혁씨는 부대 인근 소각장에서 분신 상태로 발견되었다. 군에서는 그가 “개인적인 성격으로 인한 군복무 부적응으로 군생활에 염증을 느껴 자살”했다고 밝혔다. 특히 군에서는 그가 9월 7일 2급 비문분류 예정 문서 일부를 세절 폐기한 것을 지적받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가정형편 등을 이유로 자살한 것이라고 동기를 추정했다.

하지만 유가족과 동료들은 그의 사망 직후부터 학생운동 경력이 있는 그가 비밀취급을 하는 정보과 보직으로 변경된 점, 사회과학 서적을 읽던 중 발각된 점, 보안부대가 학생운동 관련 최우혁씨를 특별 관리한 점 등에 비추어 볼 때 자살로 볼 수 없다며, 의문사로 진상규명을 요구하였다.

최우혁씨가 근무하던 20사단은 부대 전체가 충정부대로 유일하게 미군의 간섭을 받지 않고 한국군 단독으로 이용할 수 있는 부대였다. 1987년 민주화운동이 고양되던 시기 20사단의 충정업무 중에는 학생들의 시위진압이 포함되어 있었다. 충정부대는 부대원들에게 시위 진압 임무와 역사에 대한 교육을 일상적으로 하는 부대이다.

전두환 정권에서 충정부대의 상황과 분위기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확보한 다음과 자료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학생 등 각종 시위진압을 위하여 항상 데모 진압훈련을 하였고, 작전 상황판에 작전 계획에 경희대와 외대에 대하여 학교의 건물 위치나 약도가 그려져 있었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학교를 점령하고 항거하는 데모대나 집단으로 몰려 있으면 사살한다는 이야기도 돌고 있었다. 6.29선언 전까지 장갑차에 완전무장을 하고 비상대기하였으며 데모 진압을 나가게 되면 이제 죽는구나 하고 생각을 한 적도 있다. 1987년 7월 초 무장은 해제 되었으나 계속 진압훈련은 하였던 분위기였다.”

최우혁씨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1987년 그가 의문사한 직후부터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여러 의문사 유가족들과 함께 기독교회관에서 농성을 하였다. 130일에 걸친 유가족들의 요구로 1988년 5공화국 비리 진상조사 특위 조사과정에서 군 의문사에 대한 자료들이 몇 가지가 확보되었다. 하지만 사인에 대한 진상규명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유가족들의 실망은 매우 컸다.

1991년 3월 6일 최우혁씨의 어머니는 자신이 아들을 군대에 보내 의문사 당하게 만들었다는 자책감으로 실어증에 시달리다가 한강에 투신하여 운명하였다.

아버지 최봉규씨는 2016년 2월 10일 돌아가시기 전까지 유가협(민주화운동 유가족 협의회) 총무로 활동하며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을 하였다.


진실화해위원회 앞 의문사 진상규명 촉구 집회 참가 모습.  [사진제공-추모연대]
진실화해위원회 앞 의문사 진상규명 촉구 집회 참가 모습.  [사진제공-추모연대]


동생의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최종순씨의 삶

최종순씨는 4형제의 맏이였다. 동생 최우혁씨는 집안의 막내였다. 최종순씨는 1976년에 대학에 입학하였다. 당시 아버지는 세운상가에서 장사와 생산을 하는 사업을 하셨는데 그의 집은 시골에서 올라온 친척들이 북적대는 그런 집이었다. 그는 1982년 군을 제대한 후 취직을 하였다. 동생이 사망하기 전까지는 어렵지 않게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하는 삶을 살았다.

1987년 동생의 사망은 그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막내아들의 의문사를 밝히기 위해 아버지 어머니는 농성을 마다하지 않으셨고, 끝내는 자신이 막내를 잃게 만들었다는 자책감에 어머니가 투신하여 돌아가시는 상황을 겪었다.

아버지는 동생의 진상규명을 위해 사회운동가가 되었다. 집안 생활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그의 몫이 되었다. 그래서 2018년까지 직장생활을 하며 집안을 책임졌다. 과 사업 등을 하였다.

2016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동생의 의문사 진상규명 활동이 중단되자 집안에서 누군가 활동을 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그는 2018년부터 의문사를 포함한 강제 징집 녹화·선도 공작 피해자들과 함께 대책위원회에 대표를 맡아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2020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법’이 제정되고 진상규명 조사를 위한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하였다. 그는 동생 최우혁씨의 의문사 조사를 위해 2021년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상규명 신청을 했다. 그리고 강제 징집 피해자들과 함께 동생의 진상규명을 위해 집회도 하고 1인 시위도 참여하고 있다. 유가협 회원으로 그는 아버지가 못 다 이룬 민주유공자법 제정을 위한 농성과 집회에도 참여하고 있다.

그에게 활동하면서 어려움이 무엇인지 물었다.

“직장생활은 기한이 있어요. 어떤 일이든 몇 년이 지나면 진전이 되어있던지 아니면 중단할 것을 판단할 수 있는데, 의문사 진상규명 일은 기한이 없는 것 같아요, 그게 어려움이에요. 조사에 진전도 없고 시간만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는 현재 한국의 정치 구조에서는 진상규명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래도 최근에 겪은 세월호 진상규명도 진전이 없는데, 이태원 참사도 뻔히 보이는데 진상규명이 막혀있는 것 같다고 했다. 국가가 근본적인 자성도 없고 책임도 지지 않으려 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것 같다고 했다.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구조가 아닌 것이다.

“요즘 진실화해위원회를 보면 더욱 의문사 진상규명에서 멀어지는 것 같아서 안타까워요. 진상규명 조사도 안 되는데 과거사 사건에 대한 가해자 처벌은 더욱 어렵겠죠.”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방법에는 무엇이 있겠는지 질문하였다.

“특검 등 수사 방식으로 조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봐요. 국가기구에서 조사해야 그나마 진상규명이 가능하지 민간이 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의문사는 국가가 공식기록으로 남기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아요.”


최종순씨가 민주유공자법 제정을 촉구하는 국회 본관 앞 시위 모습. [사진제공-민주유공자법 추진단]
최종순씨가 민주유공자법 제정을 촉구하는 국회 본관 앞 시위 모습. [사진제공-민주유공자법 추진단]


그가 동생의 의문사 진상규명을 멈출 수 없는 희망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민주유공자법 농성,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해 집회 등에 새벽부터 1인시위 나와 주는 사람들이 있고, 추운 여의도 농성장에서 잠을 자면서 농성장을 지키는 사람들 때문이다. 유가족도 아닌 사람들도 나서는데 가족이 멈출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남겨진 책무를 이어가는 그의 활동에 한국 현대사에 남겨진 피해자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고 있는 최종순씨는 어머니, 아버지를 이어 동생의 의문사 진상규명과 함께 이제는 의문사로 남겨진 전체 사건들의 진상규명을 대표하는 책무까지 안은 채 활동하고 있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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