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추모연대) 20여명이 19일 오전 경기 과천시 추사로 54 국군방첩사령부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군 의문사 자료 공개”를 요구했다. 고경태 기자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추모연대) 20여명이 19일 오전 경기 과천시 추사로 54 국군방첩사령부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군 의문사 자료 공개”를 요구했다. 고경태 기자

권위주의 정부 당시 민주화 운동에 나섰다가 ‘보안사령부’(보안사)에 끌려가 불법 구금되거나 고문받은 피해자와 유족들이 국군방첩사령부(방첩사) 앞에 모여 “군 의문사 자료를 공개하라”고 요구했다.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추모연대)와 강제징집녹화·선도공작 진상규명위원회 회원 등 20여명은 19일 오전 경기 과천시 추사로 54 국군방첩사령부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 신청된 22건 의문사 사건 중 절반이 방첩사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돼 있지만, 자료공개를 요구해도 대부분 ‘부존재’ 답변을 들어야 했다”며 “의문사 자료 공개 비협조는 방첩사가 그동안의 반민주·반인권적 행위에 대한 어떠한 반성도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방첩사는 1950년 10월 특무부대로 출발해 1968년 육군보안사령부, 1991년 기무사령부, 2018년 군사안보지원사령부 등으로 이름이 계속 바뀌었고,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2022년 11월부터 지금의 이름을 사용해왔다. 권위주의 정부 시절 보안사는 군 수사기관임에도 민간인에 대한 사찰은 물론 불법수사·구금과 고문 등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려왔다. 기자회견에 참여한 이들은 대부분 1970·80년대 피해자들이라 ‘보안사’라는 옛 이름이 익숙했다.

노동야학을 하다 보안사에 끌려가 3주 조사를 받고, 강제징집돼서는 군 보안대에서 조사를 받았다는 장현일 추모연대 의장은 “40여년 전 보안사에 끌려가 수사요원으로부터 ‘여기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나갈 수 있다’는 협박을 듣던 일이 눈에 선하다”며 “보안사가 이러한 무도한 행위를 한 번이라도 반성하고 머리 숙여 사죄한 적 없다. 강제징집과 관련한 존안 자료도 없다고 발뺌하다가 노무현 정부 때 슬그머니 내놓은 적 있지만, 아직도 중요한 자료공개를 안 하고 있다”고 말했다.

추모연대 등 과거사 관련 단체들이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받은 보안사 서류철. 이들이 공개를 요구하는 것은 이 목록에 나와 있는 문서들이다. 추모연대 제공
추모연대 등 과거사 관련 단체들이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받은 보안사 서류철. 이들이 공개를 요구하는 것은 이 목록에 나와 있는 문서들이다. 추모연대 제공

1987년 군 입대 뒤 5개월 만에 군대 안에서 분신 사망한 고 최우혁(서울대 서양사학과 학생)씨의 형 최종순씨는 “동생 죽음의 진상규명을 위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1·2기 진실화해위,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의 문을 두드렸지만, 진실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 방첩사가 자료를 내놓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재일동포로 1975년 외국어대에서 유학하던 시절 보안사에 끌려가 40일간 조사받고 고문당한 끝에 간첩으로 조작돼 5년형을 받았던 이동석 재일한국양심수동우회장은 “보안사가 우리 말도 잘 못 하고 한국 실정도 모르는 재일동포들을 끌고 가 고문해서 간첩을 만들었다”며 “아직 재심 청구를 못 한 재일동포 양심수 35명이 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 신청했는데 이 중 몇 명만 조사개시 결정이 났다. 보안사가 어서 정보기록을 보내줘야 조사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현재 추모연대가 군 의문사 관련 자료공개를 요구하는 사망자는 김두황 김용권 이윤성 이진래 정성희 최우혁 한영현 한희철 등 8명(아래 사건 개요 참조)이며 박태순 박창수 정경식도 보안사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021년 1년간 부마항쟁 진상규명·보상위원회에서 조사관으로 일하며 방첩사에서 자료를 조사한 경험이 있는 이형숙 추모연대 진상규명특위 부위원장은 “방첩사 지하 서고에 마이크로필름 형태로 군 의문사 자료들이 남아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 부위원장은 또한 “문재인 정부 시기에 군사안보지원사령부로 역할이 축소됐다가 다시 방첩사로 전환하면서 더욱 자료공개에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측면이 큰 것 같다”고 덧붙였다.

주요 군 의문사 사건 개요

김두황 
고려대 학생운동 과정에서 강제징집 되어 특수학적 변동자로 분류 특별관리, 녹화사업 대상자였음. 과거 헌병수사결과 1983년 6월18일 23시35분경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저진리 소재(해안 3분초 서북방 800m 지점) 매복 근무지에서 상병 류00, 일병 김OO와 매복 근무 중 지급된 M16 소총 실탄 4발에 의한 총상을 입은 상태의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며 총기 자살로 종결처리 함.

김용권 
1983년 3월 서울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하여 ‘경영대 학회’, ‘세계문학연구회’, 지하 운동서클인 ‘사회과학연구회’ 등에 가입 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함. 학생운동 전력으로 인해 카투사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군 복무 중 수차례 보안부대의 조사를 받던 중 1987년 2월20일 오전 10시40분경 소속대 막사 내에서 침대 난간에 목을 맨 채 사망함.

이윤성
성균관대학교에서 학생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활동하던 중 가두시위 과정에서 연행되어 강제징집되어 녹화사업에 따른 고문 협박 폭행 등 가혹 행위를 당함. 제205보안부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던 중 1983년 5월4일 새벽 3시에서 4시 사이 정구장 심판대에 군화 끈 및 요대로 목을 맨 상태의 변사체로 발견되었음. 당시 군은 보안부대 조사 경위를 월북기도 혐의로 조사한 것이라 함.

이진래
1979년 서울대 약대 입학 후 1981년 3월 휴학함. 1980년 5월 초 ‘전두환 신군부 퇴진’을 주장하는 서울대 학생들의 가두시위(서울대에서 서울역까지)에 참여, 5.18민주화운동 과정에 광주에 있었던 사실이 확인됨. 1981년 11월14일 입대하여 논산 제2훈련소에서 4주간의 교육을 마친 후, 평택에 있는 카투사 교육대에서 3주간 교육을 마치고 같은 해 12월31일 대구시 소재 미 19지원사령부 캠프헨리 출장자 막사에서 전속대기 중 1982년 1월2일 04시경 685동 출장자 막사 앞 정원 향나무에 목멘 상태로 발견됨.

정성희
1981년 11월25일 연세대 교내시위 도중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받은 후 징집 연령에 미달함에도 같은 달 28일 강제징집 되었고 군 생활 중 관심사병으로 분류되어 특별 관리됨. 당시 헌병수사 결과는 정성희가 1982년 7월23일 소속대에서 전방실습 대학생들과 근무투입 후 다음날 0시10분경 근무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고 밝힘.

최우혁
1984년 서울대 서양사학과에 입학 학생운동에 참여 ‘경제법학연구회’에 가입하여 활동함. 청계피복노조 합법투쟁쟁취운동’, ‘레이건 방한 반대 및 반미 시위’, ‘5·3 인천투쟁’ 등 각종 학내외 집회 및 시위에 참여함. 학생운동에 참여하다가 구류를 살고 부상까지 당하자 염려한 가족들의 권유로 1987년 4월28일 입대하여 같은 해 6월15일 육군 제20기계화사단 60여단에서 근무 중 1987년 9월 8일 분신 사망함.

한영현
한양대 공대 정밀기계학과 3학년 재학 중 교내 탈 연합회 및 부천야학 활동으로 수사기관 조사 후 강제징집 되어 특수 학적 변동자로 분류 특별관리, 녹화사업 대상자가 됨. 육군 제7사단 근무, 1983년 7월 2일 새벽 2시부터 불침번 근무 중 같은 날 오전 9시45분경 자신의 M16 소총에 의한 총상을 입고 사망하였음.

한희철
서울대 공과대학 기계설계학과 4학년 재학 중 입대 후 휴가를 나와 당시 수배 중인 한국외국어대 신재근의 주민등록증을 발급해 주려고 노력하였는데, 이 사실이 보안사에 발각되어 휴가복귀 후 군 보안부대에서 조사를 받던 중 가혹 행위를 받음. 조사 후 귀대조치 재조사 진행예정이었음.
1983년 12월11일 새벽 4시경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소재 육군 제5사단 사령부 내 비문 합동보관소 앞에서 경계근무 중, 소총 3발에 의해 사망함.

자료: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

고경태 기자 k21@hani.co.kr